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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론 Mar 25. 2024

육각형 인간

공부, 음악, 운동, 사회생활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싶었다. 10분 단위로 빼곡하게 계획을 세웠고 당연하게 실패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들이지 않은 탑이 무너짐에 슬퍼하지 않았다. 그냥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인가, 혹은 바빠서 못했다고 자신을 속였다.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술과 약속으로 시간을 뭉개다, 아차 싶었다. 이대로면 30살에도 40살에도 똑같은 삶을 살 텐데, 두려웠다. 다시 계획서를 꺼내 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돌볼 것을 추렸다. 급선무는 공부였다. 입사 면접 때 인사팀 임원분께서 '왜 학교에 가지 않고 회사에 지원했나요?'라는 질문에 '배우고자 하는 것을 찾고 공부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더 나은 삶을 꿈꾸기는 쉽지만, 그 과정을 어떻게 꾸려나갈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자기 계발서들을 뒤적여봐도 설루션은 없는 풍선들만 가득했다. 손만 놓으면 두둥실 오르다 터져버리는.


학점은행제처럼 짧은 시간에 학위를 수여하는 제도도 시도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재밌어 보이는 심리학을 선택했지만 학문으로써 마주하니 다른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와중에도 시간은 지체 없이 흘렀다.




2018년에 이르러 친구로부터 멘토님을 소개받았다. 부디 성장해서 옳은 울림을 퍼트리기로 약속하며 시작한 것은 의아하게도 휴식이었다. 나를 먼저 사랑하는 것이 첫 숙제였다.


학원이나 인강을 보면서 공부부터 시작하지 않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시간을 만들라는 말씀에 일단 행동으로 옮겼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긍정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


이후에 처음 본 자격증이 직업상담사 2급이었다. 첫 전공인 심리학과도 닿아있으며 심리 상담에 대한 기본 지식을 익혔다. 여러 기법이 있지만 결국 상담의 끝은 직면이었다. 이 자격증을 시작하며 나의 부족함과 직면을 시작했다.


암기 위주의 과목들이었기에 같은 차수에 필기와 실기를 합격했다. '아, 역시 나는 하면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만심에 빠졌다. 다음으로 본 가스산업기사는 공학적 지식을 함께 요구했다.


필기를 가뿐하게 통과하고 실기를 공부하며 해왔던 대로 준비했다. 머릿속에 남지 않고 있음에도 무작정 읽고만 있었다. '하던 대로 하자'라는 생각으로 시험장에 들어섰고 이후에 4번을 더 떨어졌다.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어떤 위안에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공부를 허투루 하고 있었다. '왜' 해야 하는 지를 모르고 글자만 쳐다보니 머릿속에 남지 않음은 당연했다.


그러다 맞이한 위험물 기능장 시험에서 결사항전의 마음으로 달려들었다. 모르면 구글과 블로그들을 뒤져보며 이해하는 공부를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재미가 붙어 새벽까지 할당량을 반드시 채우고 잠에 들었다.


3개월 간의 사투 끝에 산업기사보다 기능장을 먼저 취득했다. 머리보다 가슴으로 하는 공부에 대해 생각했고, 이후에 응시한 가스산업기사에서 바로 합격했다. 이후에는 겸손함의 늪에 빠졌다.


나 자신을 낮추려다 하대하고 천대하기 시작했다. 자존감을 바닥을 기었고, 모든 잘못을 나에게 돌렸다. 타인에게 실수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실수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였다.


우울함과 공허한 기분에 자주 휩싸여 러닝을 시작했다. 숨이 가빠오다 어느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명상도 자주 했다. 불안함을 잠재우고 돌아보니 나는 나를 학대하고 있었다.


남에게 관대하고 나에게 학대하는 일상 속에서 나를 다시 잃고 있었다. 멘토님께 말씀드리고 다시 휴식에 들어갔다.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방법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영원할 것 같던 고치를 뚫고 나온 나는 한결 성장해 있었다. 그 시간들은 나를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데미안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제야 공부다운 공부를 시작하고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직 공부 외의 시간을 즐기다가 자주 불안하다. 배덕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나에게도 휴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쉬지 않고 달리는 말보다 천천히 걷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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