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5일
미국에 온 지 177일째 되는 날 _ (지금은 불체 중)
뉴욕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기에 그동안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려 갖은 시도를 해보았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흔히 앱으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성친구, 동성친구 할 것 없이 다양한 앱을 통해 일상에서 접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마치 한국에서 전에 본 적 없는 친구의 친구를 소개팅으로 만나거나 부모님을 통해 선을 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반대로 미국에서는 소개팅과 맞선이 흔한 일이 아니다.)
나도 앱이 아니었다면 실생활에서 만날 일이 없었을 사람들을 앱을 통해 많이 사귀었다. 그중 한 명은 퀸스구역의 검사친구였다. 만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이 친구가 내 월세방에 와보고 여기가 사람살 곳이냐며 자기네 집에 한 방이 빈다고 와서 하숙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방 세 개 딸린 전원주택에서 부모님과 같이 사는 상태이고 어머니는 학교선생님, 아버지는 노인정에 다니고 입양한 강아지도 한 마리 있다고 했다. 침대, 전기세, 물세, 식비까지 전부 포함해서 달에 1200불 하숙으로 “구두계약”을 맺었다.
달에 오백 불씩 하던 주어온 침대 하나뿐인 월세방에서 달에 1200불씩이나 하는 하숙집으로 사 개월 만에 이사를 간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내 주머니 사정에 맞지 않게 무리해서 내린 결정이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선택을 했던 이유는 그동안 가족의 품이 사무치게 그리워서였다.
하숙집은 내 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북적거리며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매일 집에서 만날 친구가 있고 어쩌면 강아지 산책 기회도 주어질지 모르고... 미국에 온 뒤로 가족 단위로 뭉쳐 다니는 미국 사람들을 보면서 이보다 더 갈망했던 조건은 없었다. 게다가 가족들 모두 멀쩡한 직업을 갖고 있으니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겠거니 섣불리 믿음이 간 것이다.
이사 첫날 친구어머니와 가족 규칙을 이야기할 겸 책상에 마주 앉았는데 보증금 1200불을 먼저 내고 매 달 첫날 1200불씩 현금으로 달라고 했다. 그동안 네일가게와 마트에 다니면서 한 푼 두 푼 겨우겨우 모아 둔 2400불이 다 나가면 내 손에는 1140불이 남는데, 이미 이 멀리까지 짐을 다 싸서 이사를 와버린 밤이었다. 보증금 이야기는 사전에 전혀 없었는데 이사 첫날 빨리 돈을 내야 한다고 재촉하는 바람에 미국 법이 그러려니 하고 2400불을 덜컥 내버렸다.
다음 날이 밝았고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째 이 집에서는 모든 그릇이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용기이고 포크나 숟가락 휴지가 전부 패스트푸드점의 일회용 제품들인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이 집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고 전부 아버지가 노인정에서 가져온 먹다 남은 쌀과 반찬들을 매일 똑같이 먹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다 검사친구와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다 먹고 나오는 길에 그 친구는 셀프코너에서 포크며 숟가락이며 휴지며 한 움큼씩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내 손을 끌며 황급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차에 검사 배지를 달고 있어 주차가 안 되는 지역에도 함부로 차를 세우고 과속을 하고 자유롭게 자기 볼일을 다 보고 다녔다. 검사배지가 있으면 이래도 티켓 맞을 일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정말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셋다 멀쩡한 직업을 가진 가족이 뭐가 부족해서 의식주를 전부 남에게서 훔쳐온 것으로 해결한다는 말인가. 미국에 온 뒤 아무리 가난해졌어도 남의 것을 훔친 적은 없다. 아니,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살아서 애초에 생각해 보지도 않은 분야이다. 저들은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수치심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 뒤로도 날이 가면 갈수록 이상한 점들이 계속 감지되었다. 내 방은 자물쇠가 고장 나서 잠기지 않는 방이었는데 퇴근해서 보면 사람이 들락날락한 흔적이 계속 발견된다든가, 전신거울 위치가 자꾸 내 침대를 향하게 바뀐다든가 (거울각도를 조절하면 검사친구의 방에서 내 침대를 볼 수 있다), 지하실에는 새벽마다 다른 이성친구가 부모님 몰래 방문한다든가, 돈을 꾸라, 투자하라고 계속 압박을 한다든가...
달에 1200불을 내고 매일같이 남이 먹다 남긴 풀과 밥들을 먹는데 신변안전까지도 보장되지 않은 이 집에서 스무날을 버텼고 더 이상 있다가는 내가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스무하루째 되는 일요일 아침 이사를 나가겠다고 친구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구두계약이기는 하나 보증금까지 2400불을 내고 스무날밖에 살지 않았는데, 그리고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친구의 집인데 당연히 보증금은 돌려주겠거니 어리석은 짐작을 하고 있었다. 직업이 주는 편견을 갖고 살아온데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검사니 선생이니 그것은 한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남의 포크도 음식도 다 자기 것인 집안이 아니던가. 친구 어머니는 절대로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0으로부터 시작해서 정말 힘들게 번 돈이다, 같은 이민자끼리 왜 그러냐, 어머니 자식도 한 명 한국에서 혼자 지내고 있지 않느냐, 자식 생각해서라도 보증금은 좀 돌려 달라... 그 어떤 설득도 애원도 "주지 않겠다"는 그녀의 완강한 의지를 뚫을 수 없었다.
사실 자기 검사 자식을 믿고 이런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신분도 없는 상태에서 도덕 빼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이 가족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법을 갖고 노는 친구 앞에서 자칫하다가는 이민국으로부터 추방을 당할 수 도 있으니 나는 그저 짐을 다 싸들고 이 집을 나오는 수밖에... 그렇다고 이 집에 이미 지불한 두 달 치를 다 살고 나오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지금 다니고 있는 슈퍼마켓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이사 첫날 슈퍼마켓 사무실에서 하루 묵었다.
캐리어를 끌고 밤에 이동한 이 차가운 사무실 바닥에서 머리가 핑핑 돌고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고 밤새 헛구역질이 났다. 같은 이민자들끼리 이토록 살벌할 것 까지야 없지 않은가. 그 집은 정글이었다.
참으로 비싼 인생 수업료를 치르고 다짐한 것:
사람하나 믿고 함부로 거처를 옮기지 말 것.
그 어떤 직업에도 편견을 가지지 말 것.
헛구역질을 할 때마다 다짐에 또 다짐을 반복하며 화장실에 주저앉아 다음 날 출근시간이 되기를 밤새 기다렸다.
하숙집 근처 호수_
혹시라도 주인아주머니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_
네. 맞습니다. 당신 집이 브런치에 등장했네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