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8일
미국에 온 지 180일째 되는 날 _ (이제는 불체자)
한 밤중에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온 하숙집에서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다락방 사무실로 피신을 오고 나서 벌써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살 곳을 찾아보려 노력했으나 나의 예산과 상황에 마땅한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루에 열두 시간을 근무하다 보니 낮에 집을 보러 다니기란 불가능했고 다시 Flushing 지역으로 돌아가 룸메이트를 구하기에는 네 시간이라는 출퇴근 시간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렇다면 남은 무기는? 두꺼운 얼굴!
담당하고 있는 슈퍼마켓은 아홉 군데나 되었고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마켓의 지붕에는 나의 사무실 공간과 유사한 빈 다락방 공간이 있다. 아직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캐시어 분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한 방이라도 거주할 수 있게 세를 내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두꺼운 얼굴을 무기로 단단히 장착하고 오늘 사장님과 면담을 하자고 요청드렸다. 나의 딱한 사정을 알고 나서 실제로 거주하기는 힘든 조건이지만 그래도 살고 싶다면 월세를 내주겠다고 하셨다. 생각보다 빨리 살 곳이 구해진 셈이다. 점심시간을 타서 잠시 오늘 저녁부터 거주하게 될 곳을 둘러보았다.
맙소사. 창문이 아예 없어 햇빛이 안 들어오고 에어컨을 설치할 수 없는 구조였다. 아래층이 슈퍼마켓이다 보니 뉴욕 생쥐들과 동거를 하게 되겠구나 쉽게 짐작이 갔다. 마트가 번화가 한가운데 있다 보니 경적소리, 요란한 음악소리, 마트 바로 앞 지상철 소리( 뉴욕에는 지하철뿐만 아니라 지상에도 전철이 많이 지나다닌다. 특히 Queens 퀸즈 지역은 더욱 그렇다.) 이 비싼 땅덩어리, 이 빈 공간에 왜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는지 잘 알 것 같았다.
한 달에 오백 불로 합의를 봤다. 교통비가 들지 않을 예정이니 한 달에 110불씩 절약도 되는 셈이다. 출퇴근 시간이 1분으로 단축되다 보니 하루 네 시간을 벌게 된 셈이다. 무려 룸메이트 없이 혼자 살 수 있다. 이 정도면 쥐들과의 동거도 가능하지 않을까? (항상 드는 생각 하나, 생쥐들은 시민권자라 얼마나 좋을까. 아, 부럽다.)
나는 얼른 퇴근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것저것 저렴하고 강력한 청소도구들을 마트에서 구입한 뒤 얼른 내 방에 가서 청소를 하고 짐을 풀고 싶었다. 이 공간도 내 집이라고 이름을 지으니 앞으로 예쁘게 가꾸고 잘 살아보려는 애정이 갑자기 생겨났다.
그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보니 청소하는데 새벽 네시까지 걸렸다. 창문이 없어 환기가 되지 않으니 청소를 끝내고 진한 화학용품 냄새가 온 방안에 진동했다. 자기는 글렀고 이러다가 질식할 것 같아 방안에 누워있기도 글렀고 새벽 네시에 거리로 나섰다.
처음으로 마주한 조용한 이 거리, 텅 빈 이 거리, 나도 이제 이 거리의 일원이다. 여기서 조깅도 할 것이고 끼니도 해결할 것이고 이곳에 머무는 시간을 내 인생의 멋진 추억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집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 엄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아무리 찌그러지는 남의 월세방에 살아도 자기 집처럼 아끼고 깨끗이 치우고 애정을 갖고 가꾸다 보면 언젠가는 자가를 마련하게 된다고.
논리나 근거는 부족하지만 자기 삶에 대한 애착을 갖고 남의 것도 내 것처럼 존중해 가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다 보면 머지않아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곤 했는데, 이제는 논리며 근거며 다 필요 없고 그저 실제로 그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피부에 좋다는 거미줄을 휘휘 손으로 저어가며 걷힌다.
건강에 좋다는 계단 오르기를 손잡이를 꽉 잡고 정신을 가다듬고 하고 나면 이 세상 둘 도 없는 나의 안식처가 나온다.
짐을 나르거나 계단을 내려갈 때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