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2일
미국에 온 지 222일째 되는 날 _ (지금도 불체 중)
사람들에 지쳐 이 멀리 뉴욕까지 피신 아닌 피신을 왔지만 사람이 그리워 데이팅앱을 헤집고 다녔던 그동안 나의 행적을 이실직고한다.
뉴욕에서 사용률이 높은 데이팅앱은 Tinder, Hinge, CMB, Bumble 정도가 되겠다. 사실 데이팅 앱을 아직 깔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가지 앱만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 짐작한다. 왜냐하면 앱 화면을 넘기다 보면 같은 사람이 이 앱에도 등장하고 저 앱에서도 약간의 다른 사진을 사용해 등장하기 때문이다.(나도 그랬다... 하하;; )
장점이라고 한다면 쉽다. 아주 쉽다. 기호에 따라 오른쪽 왼쪽으로 엄지손가락을 이동하기만 하면 대화창이 형성되거나 상대를 거절할 수 있다. 그렇게 다음 세 명과 실제로 몇 주 간씩 짧은 만남을 가졌고 세 번째 사람을 떠나보낸 오늘은 마음이 너덜너덜 싱숭생숭해져 그간의 나를 좀 돌아보려 한다.
첫 번째 사람
CMB앱을 통해 대화가 시작된 이 사람은 하버드대 조교수를 거쳐 지금은 Mount Sinai 병원에서 폐암을 연구 중인 교수였다. 잠깐 점심시간이 빈다고 하여 그의 병원에서 의사가운을 입은 모습으로 어느 토요일 날 처음 만났다.
각자 커피를 사서 병원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꽤나 성공한 그의 모습이 우러러 보이기도 하고 지나다니는 연구실 학생들이 오고 가면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잠시 나의 대학시절을 추억케 했다. 데이팅앱에 올라온 사진과는 약간 다른 모습이었지만 이 또한 소탈한 매력이라 여기고 첫날의 짧은 만남 이후로도 주말에 시간이 날 때면 병원에서, 센트럴 파크에서 잦은 만남을 이어갔다. (한국에 계신 독자분이라면 교수가 데이팅 앱을?이라는 의문이 들 지도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직업, 성별, 나이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앱을 사용하고 있다.)
갑자기 사나흘 정도 연락이 끊겼다가 어떤 날은 또 하루종일 연락이 되던 것 빼고는, 약속을 자주 취소했다가 급하게 다시 잡는 것 빼고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바로 그 점이 이상하다는 것을 미리 발견하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다.
나는 연락이 안 되는 날에는 논문을 쓰거나 심사 중에 있겠거니 하고 기다림을 이어 가다가 워낙 자기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이니 이름을 구글링 하면 그의 논문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연락이 두절된 어느 날 그의 긴 Full name 풀네임을 검색해 보았다.
내 눈을 의심했다. 논문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개인정보도 같이 검색이 되는 것이 아닌가! 유명한 사람인 줄 알면서 왜 검색해 볼 생각을 안 했던 것일까. 순진했다. 그는 기혼에 나이는 내가 아는 나이보다 열 살이 더 많았다. 평소에 나이에 신경 쓰는 성격이 전혀 아니지만 거짓말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 알고 있는 나이보다 열 살이 많은 것을 처음부터 알았어도 나는 만나 봤을 것이다. 그것이 거짓말만 아니었더라면.
나를 만나고 있는 줄 모르고 있을 이 사람의 부인은 무슨 죄인가. 그동안 그와 함께 갔던 파티에서 그의 동료 교수들도 만났고 친구들도 만나 술을 마시고 밥을 함께 먹었다. 그들은 왜 그의 바람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사라 여기서는 정녕 친구가 바람을 피고 거짓말을 하고 다녀도 눈감아 주는 것이 예이인 것일까. "부부의 세계"속 여다경이 될 뻔했던 나는 서둘러 그의 연락처와 그동안의 사진들을 삭제하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며칠 동안 몸이 아프도록 운동을 했다.
두 번째 사람
뉴욕 퀸즈시의 검사이다. 얼마 전 등장했던 "값비싼 인생수업"의 주인공이시다.
그 역시 멀쩡한 가족과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실속은 집안 전체가 사기꾼인 기가 막힌 인물이었다.
세 번째 사람
해군부대의 치과의사였다. 어느 토요일 점심 뉴욕의 한 브런치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인도네시아 이민자 출신인 이 사람은 초등학교 때 먼저 이민을 와계신 홀어머니를 따라 이민을 오게 되었다고 했다.
엄격한 Keto 케토 다이어트 중이라 식당을 고르는 데 있어서 매번 아주 까다로웠다. 나는 주야장천 운동만 해왔지 식단관리까지는 엄격하게 하지 않는 편인데 이 사람은 운동에 식단관리까지 철저히 한다고 하니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리라 예상했다. 그도 운동주제만 나오면 눈을 반짝이는 나와 만날 때마다 긴 대화를 이어 갔다. 우리는 주말 아침 일찍 만나 장거리를 같이 달리곤 했다. 운동에 진심인 두 사람이 만나니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몇 주를 그렇게 만나 왔을까. 사이가 막 깊어질 무렵 어머니를 한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해서 선뜻 그러겠다고 했다. 첫 만남에 나의 "목적"을 묻는 것이 아닌가. 목적은 무슨. 없다고 대답했다. 싱글 남녀가 만나는데 목적이라니. 그저 잘 맞고 좋아서 보는 것이지. 그는 무례한 질문을 계속 아무렇게나 던지는 어머니 옆에서 히죽히죽 웃기만 할 뿐 아무 대꾸를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벌써 피곤해진 이 관계. 이쯤에서 접어야 하는 것인가.
물론 자식이 불체자를 만난다면 걱정이 된다는 것은 알겠으나 본인들도 그 시절을 겪어온 사람들이 아니던가. 같은 이민자끼리 더한다 참. (안 잡아먹는다고!!!)
불체자는 친구를 사귀어서도 안되고 연애를 해서도 안 되는 것일까. 그러다 어느 순간 합법체류로 전환되고 나면 정상인의 삶을 시작해도 되는 것일까. 친구를 사귀고 애인을 만들고. 이런 것들이 합법체류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일까 과연. 정작 나라는 사람은 변한 것이 없는데 서류 한 장의 차이로 이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
나는 오늘 그와 그만 만나기로 결정을 내리고 그동안 두루 잘 맞았지만 나의 의도를 의심했음에 이별을 고했다. 일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일이 아닌 개인 생활에서까지 나의 존엄을 잃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앱에 전부다 이상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앱으로 만나서 결혼하고 잘 사는 커플들도 수두룩하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를 만나든 편견을 갖지 않는 것.
중요한 것은 누구 앞에서든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것.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그들과 불안정한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좌절하지 않는 것.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에서 끌려다니지 않는 것.
중요한 것은 아무리 접점이 없는 사람일지언정 기본 예의와 서로에 대한 존중은 항상 지켜 나가는 것.
-이상 데이팅앱 사용 설명서 비슷한 회고록을 마친다-
몇 날 몇 시에 아름다운 보태니컬 가든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고 바람맞았던 네 번째 "데이트".
데이팅 전문용어로 Ghosting "고스팅"을 당했다고 일컫는다.
날이 예뻤고 꽃들이 예뻤으니 그걸로 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