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2일
미국에 온 지 234일째 되는 날 _ (지금은 불체 중)
내가 떠나온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요즘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린다고 한다.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죽어 나가고 전염성도 강한데 아직 비말로 전파가 되는지 피부로 전염이 되는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이니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공공장소에 최대한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한다.
걸리면 그저 속수무책으로 죽는 병이라나.
맨해튼에 몇 명 걸린 사람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코로나에 걸린 사람을 실제로 본 적도 없고 아프다는 사람도 주변에 없으므로 나는 그 바이러스가 실감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단 슈퍼마켓에 출근을 하면 전염병 비상사태임을 뼛속깊이 체감할 수 있다. 매상이 크리스마스 전날을 넘어선다. 최근 일주일간 매일 그렇다. 처리할 영수증은 세 배, 네 배, 물건을 채워 넣기 바쁘게 야채며 고기며 쌀이며 생필품이며 매장에 남아도는 제품이 하나도 없다. 아홉 매장 모두 그렇다. 나는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할 만큼 업무 처리량이 갑자기 느는 바람에 쌓여있는 송장들 틈에서 허덕이고 있다. 일 복이 잭팟 급으로 터져버린 것이다!
내일 23일부터는 뉴욕시 전체를 lock down록다운 한다고 뉴스에 공지가 올라왔다. 사장님은 홍수가 범람하듯 갑자기 늘어난 업무를 혼자 처리하는 나와 쉬는 시간이 1분도 주어지지 않는 캐시어분들이 안쓰러웠는지 내일 록다운을 하기 바로 전날인 오늘 저녁 캐시어분들과 회식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여태 록다운이라는 것을 다들 겪어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얼마 동안이나 닫는 건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식당들을 닫는 것은 분명한 일이니 오늘 저녁 회식자리는 우리 모두에게 아주 달가운 자리였다.
반가운 소식 하나!
사장님은 오늘 저녁 회식 자리에서 내 월세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저 착오 없게 일만 잘해 달라고. 어차피 아무도 안 살았던 다락방 공간이니 월급을 올려준 셈 치고 그저 살 수 있는 데까지 살아보라고 하셨다. 그대는 정녕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사람인가! 오늘 저녁이 나에게는 역대급으로 행복한 회식 자리였다.
해외영업사원으로 회사를 다니던 시절에는 거의 매일 있다시피 하는 회식자리가 버거웠다. 이러다 내 간이 주인을 그만 포기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겁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미국에 오고 나서 200일이 넘도록 회식한 번 해본 적이 없고 이렇게 술을 양껏 마셔본 적도 없었는데 날이 가다 보니 참 별일이 다 있다.
록다운 전날 밤의 파티를 그렇게 마치고 다시 슈퍼마켓 다락방으로 계단을 조심스레 타고 올라왔다. 이 계단에서는 술을 진탕 마시고 네 “발”로 올라오다가는 자칫 골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허벅지에 힘을 꽉 주고 두 발로 올라왔다.
얼마 전 같은 이민자로부터 보증금 사기를 당하고 이 다락방으로 밤에 이사를 와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쓰렸는데 이제 친인척도 아닌 사람한테서 무료로 주거를 해결하다니. 세상 참 살고 볼 일이다.
얼마 전 네일가게에서 해고를 당하고 나서 막노동에 소질이 없음에 좌절감을 맛보았는데 나 같은 불체자에게도 이런 사무직 자리가 주어지다니. 참 고마운 일이다.
어쩌면 내일부터 얼마동안이 될지 모르는 록다운에 네일가게들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은데, 미리 탈출해서 오히려 일복이 터져버린 슈퍼마켓으로 이직을 하다니. 게다가 마트이다 보니 이 시국에도 음식이나 생필품이 떨어질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행운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얼마 전까지 룸메이트와 동거하거나 하숙집에 거주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부딪혔는데 지금은 아무리 쥐구멍만 한 다락방일지라도 적어도 혼자서 거주할 수 있다. 코로나에 격리만큼 효과적인 예방법이 또 있을까?
나는 참 행운아다.
이 삶 참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