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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 빛 Apr 08. 2023

직장동료가 없다는 것은 행운인가 불운인가

2019년 10월 15일

미국에 온 지 75일째 되는 날 _ (이제 곧 불체자)




슈퍼마켓 경리로 일한 지 약 2주째.



네 시간의 통근 시간이 고된 것 빼고는,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이 근무시간이라 지루한 것 빼고는, 출근해서도 퇴근해서도 소소한 잡답조차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 빼고는, 근처에 식사를 할 만한 식당이 거의 없다는 것 빼고는, 슈퍼마켓 지붕에 삼각뿔 다락방 공간이 나의 일인 사무실이라 한 가을인데도 찜통더위와 컴퓨터 열기를 한 몸에 받아낸 다는 조건 빼고는 다닐만했다.



이렇게 다 빼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류미비자인 나를 받아준 사무실이라는 사실, 주급을 꼬박꼬박 지급해 준다는 사실, 이렇게 천장이 낮은 다락방일지라도 내 키가 워낙 작아서 머리를 숙이며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마치 나만의 맞춤형 공간이다), 시시콜콜 괜한 것을 물으며 속상하게 만드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출퇴근 시간이 길어 버스에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사실, 다섯 정거장 전에 내려 뛰어서 목적지까지 도착하기에 운동할 틈이 있다는 사실, 땀을 흘려도 (조금 찝찝할 뿐)마주칠 사람이 없어 민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 전에 했던 해외영업직과는 달리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에 품위유지비를 예산에서 빼 버려도 된다는 사실, 마치 내가 마트 주인인양 돈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부터 시작해 비즈니스의 총 흐름을 관철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밖에도 수도 없이 많은 사실들에 매일 고마워하면서 지냈다.



불과 몇 달 전, 못해먹겠다고 멀쩡히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둘 때까지는 나에게 소소하고 당연한 사실들에 고마움을 느끼는 이런 말랑말랑한 순수함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에서 무로 돌아오고 나니 하루하루 고맙지 않은 날이 없었다.



불체자의 길을 선택해 걸으면서 나는 점차 삶의 밝은 면을 발견할 줄 아는 시각을 장착하게 되었다. 








Lincoln Memorial Reflecting Pool

홀로 솟은 기념비가 마치 한때의 나 같아서

날씨 좋은 날 찍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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