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30일
미국에 온 지 60일째 되는 날 _ (아직은 불체 전)
생전 처음 다녀 보는 네일 가게를 미국에 온 다음 날부터 꼬박 두 달을 다니다가 어제 퇴근길에 보기 좋게 잘렸다. 내일부터 너는 안 나와도 될 것 같다면서. 이 말은 나와도 된다는 뜻인가 잠시 사장님의 마지막 말에서 말장난을 쳐서라도 희망을 찾아보고 싶었다.
이제는 여름철 네일가게 성수기가 지나가는 시점이니 사장님들은 합법적인 신분과 자격증이 없고 실력도 왕초보인 직원 순으로 가지치기를 시작한다. 내일 월세를 내야 하는데 딱! 시월이 되기 전 날부터 그 가지치기가 시작되었고 하필 그 대상자가 내가 될 줄이야.
뉴욕에 온 이후로 하루도 마음 편히 동네구경조차 해보질 않아서 이 기회에 여행을 좀 다녀 보려고 아침에 일어나 그동안 모아 놓은 현금을 세어 보았다. 꽤 벌어 놓은 것 같은데 아무리 세어보아도 1350불. 내일 월세 500불을 내고 나면 다음 한 달은 또 어떻게 버텨야 하는가. 여행 같은 생각은 이내 접었다.
노동비자가 없으면 미국 내에서 사무직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주변에서 주워듣기도 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어림짐작 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무직 취업 준비를 애초에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무조건 일용직이나 막노동이 답이라고 스스로 단정 지어 버렸던 것이다. 밑져야 본전인데 도전해 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나는 한국에서 취준생 시절에 작성했던 이력서들을 약간의 수정과 번역을 거친 후 이곳저곳에 보내 보았다. 현재 곧 만기가 될 여행비자로 체류 중이고, 다른 비자는 받을 희망이 없으며 은행계좌도 내 이름으로 된 집주소도 없다는 것을 명시해 둔 다소 무모한 이력서는 이 기회에 처음 작성해 본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상태에 다다르니 자연스럽게 사람이 솔직해지고 무모해진다.
오전에 이메일을 보내두고 점심을 먹고 오래간만에 밀린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무려 세 곳에서 연락이 온 것이 아닌가! 나는 그중에서 한 주에 천 불씩, 매주 월요일 현금으로 지불해 준다는 슈퍼마켓 전산업무를 골라 면접 일정을 잡았다.
한 달에 적어도 사천 불을 현금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을 상상하니 심장이 벌렁 거렸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연말 보너스가 나오기 직전보다 더욱 설레는 저녁을 보냈다. 아직 같이 축하해 줄 친구를 사귀기 전이라 혼자 맥주를 사들고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데 온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내일은 어떻게 뭘 먹고살아야 하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아직 합법적인 신분이 갖추어지지 않은 분께서 사무직을 구하고 있다면 현금흐름이 원활한 직종으로 공략해 볼 것을 권장드린다. 막연히 생각해 보았을 때 사무직과 불체자는 거리가 멀 것 같지만 사실 지금도 찾아보면 기회는 많다. (Tax ID 텍스 아이디는 신분에 상관없이 발급받을 수 있고 이 숫자들을 가지면 세금도 낼 수 있다.) 그러니 지레 겁부터 먹지 마시고 한 번 이력서를 넣어 보기를 추천드린다. 만약 막노동에 소질이 없는 분이라면 말이다...
서류 합격, 인적성 검사, 일차 면접, 토론 면접, 최종 합격의 복잡다단한 절차도 신입사원 합숙 연수도 없이 그저 이력서와 면접만으로 사람을 뽑는다는 사실에 나는 벌써 자신감이 솟구쳤다. 내일 당연히 면접에 합격할 것이고 최대한 인사담당자님을 잘 구슬려 내일부터 출근을 시켜달라고 해야겠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은 면접 전이다. 그저 김칫국에 불과함을 알리는 바이다.)
맥주 두 병에 자신감이 끝도 없이 솟구치는 밤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퇴사가 꿈이었던 회사원,
이제는 사무직이 꿈이 되어버린 불체자 백수.
사무직은 한줄기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