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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 빛 May 07. 2023

불법체류자로 산다는 것은

2021년 6월 15일 _ 미국에 온 지 684 일째 되는 날





혹 소프트웨어 버그 현상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

설정해 둔 아이디에 맞는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해당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뜨고, 비번 찾기를 실행하면 그런 아이디가 등록된 적이 없다고 뜨고, 새로 회원가입을 시도하면 이미 회원가입 중이라 중복 회원가입이 불가능하다고 뜨는... 결국 돌고 돌아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은 채 시간과 성격만 버리는 허무한 경험.



불법체류자로 어딘가에 머문다는 것은 이러한 버그 현상을 온라인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매번 마주하는 일과 흡사하다. 아니다. 서류미비자라고 칭하겠다. 딱히 밀입국이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세상에 존재 자체가 불법인 사람은 없으므로 용어를 달리하여 자신을 칭해본다. 어찌 됐거나 내가 선택한 길이니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이런 불편함이 있음을 기록하려는 것이다.



대중교통이 보편화된 아시아의 큰 도시들에서만 살아오던 나는 여태 운전면허를 따야겠다는 강력한 필요성을 느낀 적도, 차를 사고 싶다는 강한 구매욕구가 든 적도 없었다. 무작정 걷는 것도, 장거리를 뛰는 것도 좋아하니 버스 정류장이나 목적지까지 도보로 가는데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살아왔다.



하지만 미국에서 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웬만한 거리는 뛸 수 있는 거리가 아니고, 택시요금은 어처구니없게 비싸고, 대중교통은 요즘 들어 더욱 위험해졌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큰 도시들처럼 대중교통으로 자기가 가고 싶은 웬만한 곳에 다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이제는 운전면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주마다 법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뉴욕주에서는 2019년 12월부터 서류미비자도 뉴욕에 거주지를 둔 사람이라면 신분에 상관없이 운전면허를 발급해 주는 "그린라이트 법"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서류미비자라도 최소한의 서류는 갖고 있어야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진다. 이를테면 뉴욕에 살고 있다는 증거인 렌트 계약서(1점), 공과금 영수증(1점), 유효한 외국여권(4점), 은행 거래내역서(1점) 등을 두루 합쳐 6점이 되어야 응시가 가능하다.



그러나.



서류미비자이면 렌트계약서에 이름을 올리기가 힘들다. 개인대 개인으로 계약을 하는 하우스라면 어떨지 몰라도 올해 이사를 온 임대 사무실(leasing office)을 자체로 갖춘 아파트들은 입주 조건이 까다로워 나는 이름을 올리지도 못한 채 남자친구의 동거인 자격으로 열쇠 하나만 더 받아서 살고 있다. 고로 내 이름으로 된 공과금 영수증과 렌트 계약서를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은행계좌라도 만들어 보려고 여러 은행을 방문했는데 외국 여권 하나만으로 은행 통장을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은행에서도 거주지 증거를 요구했고 합법적인 신분과 사회보장번호가(SSN) 있어야 통장을 발급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은행 입장도 이해는 한다.



설상가상으로 유일한 법적 아이디인 자국 여권까지 만기 되어간다. 여권을 갱신하고자 영사관에 문의했더니 무슨 상태로 왜 뉴욕에 살고 있는지 증거를 제출하라고 답이 왔다. 왜 여행기한이 지났음에도 자국으로 돌아가지 않는지도 물어봤는데 이유를 뭐라고 해야 하나 한참을 망설이다가 불명예스럽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어 여권을 잃어버렸는데 재발급이 가능하냐고 소심하게 물었다. 답은 여권 재발행 대신 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탈 수 있게 허가서 한 장을 써줄 수 있다고 했다.



아. 절망적이다.



내가 여기, 이 땅에 지금 거주하고 있다는 증명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라도 해결이 되면 좋을 텐데. 나는 과연 저 그린라이트 법의 수혜를 받아 뉴욕에서 운전면허를 딸 수 있을까.



미국에 온 뒤 나를 잔잔히 옥죄어 오던 수많은 속박에서 벗어나 무한한 자유를 얻었다고 느꼈는데 오늘 같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힐 때면 참으로 진퇴양난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겠지!


두뇌여 회전하라.


어떻게든 운전면허를 따고 말 것이다.







길가에 세워진 오래된 옐로 캡 _ 운전을 할 수 있는 세상 모든 운전자가 대단해 보이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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