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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 빛 May 02. 2023

모르는 사람끼리 진짜 가족이 되는 법

2021년 06월 04일

미국에 온 지 673일째 되는 날 _ (여전히 불체 중)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시작된 그동안 우리의 동거 생활은 지금까지 아무런 모순 없이 잘 흘러가고 있다. 모든 사회법규가 잘 지켜지는 정의로운 사회보다 더욱 정의로운 사회란 법규 없이도 알아서 잘 흘러가는 사회라고 했던가. 인종도 모국어도 여태 살아온 국가도 달랐지만 우리 둘은 첫날부터 아무런 규칙을 정해 놓지 않고 그저 서로를 아끼는 마음 하나로 순조로운 동거생활을 무난히 해나가고 있다.



동거를 시작해 보니 빨래를 누가 할지, 설거지를 누가 할지, 요리를 누가 할지를 정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그날그날 각자의 컨디션에 따라 덜 힘든 사람이 그때그때 필요한 집안일들을 하는 것이고 밖에서 더 힘들게 일하다 온 사람은 집에 오면 환대를 받으며 그저 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국제연애를 괜히 거창하게 생각했다.



서로를 자기 자신보다 더 아끼는 마음, 밖에서 지친 상대방을 집안에서 안 쓰러이 여기는 마음, 상대의 그런 선행들을 강요하거나 이용하지 않는 마음, 그러다가 둘 다 힘에 부친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난장판이 되어버린 원룸을 바라보며 깔깔 웃어넘기는 얼빠진 게으름, 두 사람 다 힘이 부쩍부쩍 솟는 날에는 용역업체 직원 못지않게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대청소를 해대는 뜬금없는 부지런함. 일일이 적어가며 규칙을 정한 것도 아닌데 이런 무언의 약속들이 몇 개월 동안 어김없이 지켜지자 이만한 룸메이트가 더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서로에게 들었다.



나는 여러 국가를 옮겨 다니며 살아오다 보니 "고향 음식"이라는 개념이 없다. 고향에 대한 향수 또한 없다. 아무 곳에나 가면 내 집 같고 한편으로는 그 어디도 내 집 같지 않은 유목민이다. 남자친구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생활을 해오다 보니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다행히(?)도 매우 낮았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만 버텨오던 우리 두 사람에게 커다란 유리창으로 햇살이 가득 비쳐 들어오는 이 10.53평 되는 원룸은 더할 나위 없는 천국이었다.





미국에 온 뒤 나에게도 거의 700일 만에 첫 휴가가 주어졌다! 고작 일주일이긴 하였으나 이 귀한 일주일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 우리는 브레인스토밍(생각 쏟아내기) 대결을 펼쳤다. 나는 서류 미비자이다 보니 미국 이외의 다른 국가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국내 여행을 계획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시카고에 계시는 남자친구의 부모님과 누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불체자라고 사귀는 의도를 의심받았던 그 전의 데이팅 경험을 토대로 이 분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했고 그보다 더 궁금했던 점은 이렇게 훌륭한 아들은 대체 어떤 집에서 키워낸 것인가였다.



남자친구도 나의 의견에 동의했기에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오늘 새벽 시카고에 도착했다. 공항에 새벽바람으로 마중 나온 부모님과 누나네 부부의 환대를 받으며 누나네 집으로 먼저 향했다. 짐을 풀고 늦은 아침을 먹고 커피타임을 가졌는데 그동안 영상통화로도 뵌 적이 없는 분들이 이토록 친숙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거쳐야 할 관문이 남아 있지 않던가!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나는 용기를 내어 비행기에서 준비하고 또 준비한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아침부터 실례지만 제가 아직 서류 미비자인 상태라 혹시 아드님을 걱정하실까 미리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다소 엄숙한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다들 깔깔깔 웃는 것이 아닌가.



"우리 다 알고 있어요. 난 또 뭐라고. 우리도 다 그렇게 시작한 사람들이에요. 난민으로 국경을 넘어온 날들이 없었더라면 얘도 여기서 태어나지 못했어요. 우리는 다 이해해요." 내가 겪어온 바로는 같은 이민자들끼리 더 차별이 심한 편인데 남자친구의 어머니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전혀 예상밖의 반응을 보여 주셨다.



이어 아버지께서도 한마디 덧 붙이셨다. "설빛씨는 우리 집에 들어온 꽃 선물 같은 존재예요. 그렇잖아요. 누가 꽃을 선물해 주면 어디 그것을 버리거나 구석에 처박아 두던가요? 예상했든 예상하지 않았든 그래도 선물 받은 꽃이니 예쁜 꽃병에 담아 집안 정중앙에 두고 꽃이 시들 때까지는 고이 간직하잖아요. 우리 아내는 심지어 시든 꽃도 사랑해요. 그러니 맘 편히 갖고 신분상태는 신경 쓰지 말아요."



꽃 선물이라. 살아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발상이다. 내가 꽃이라니. 나라는 인간은 변한 것이 없는데 누구에게는 불순한 의도를 가득 품은 음침한 불법체류자가 되고 누구에게는 반가운 꽃 선물이 된다. 남자친구의 가족들에게 나는 오늘 꽃이 되었다.



누나는 이 꽃이 집에 자주 놀러 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야 정도 쌓이고 서로를 알아가면서 애틋한 가족애도 생기고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더 큰 가족을 이루지 않겠냐면서.




전에 한국에서 5년 동안 교제하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의 가족과 평소에 연락을 자주 하면서 지냈는데 내가 취준생이 되던 시점에서 어느 하루는 전 남자친구의 아버지로부터 다음과 같이 연락이 왔다:

"설빛이 가 한국에서 취업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유학비자가 연장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겠네. 미결인 것이 너무 많으니 앞으로는 연락을 자제했으면 좋겠구나. 그러다 헤어지면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겠니. 그러니 우선 취업부터 하고 취업 비자를 받고 결혼이 결정이 되면 그때 다시 연락하자꾸나."



안 그래도 취업준비에 불안 불안한 일상을 견디던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에 믿었던 그분의 "통보"를 받고 바보처럼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날들이 있었다.

 


오늘도 하염없어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다른 의미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생전 모르던 사람들끼리 가족이 된다는 것. 이 혼돈의 세계 속에서 그런 마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자! 결혼을 했으니 오늘부터 우리는 가족이다! 시작! 하면 그때부터 왕래가 막 오고 가면서 가족관계가 시작되는 것일까? 앞으로 가족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서로 정을 쌓고 믿음을 쌓아가면서 서서히 모르는 사람들끼리 가족을 형성해 나가는 것일까?



정답은 없겠지만 남자친구의 부모님께서는 아마도 후자를 택하신 것 같다.



미국에 온 지 673일째 되는 날, 나에게는 오늘 시카고에 사는 미래의 가족이 생겼다.








Cloud Gate _ 201 E Randolph St, Chicago, IL 60602 _아직도 록다운 기간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던 시카고 클라우드 게이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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