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1일 _ 미국에 온 지 690 일째 되는 날
비록 오랜 기간 만나온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행복지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들 - 취향, 젠더 감수성, 정치 성향, 종교, 에너지, 생활습관들이 마침 너무 비슷했던 나와 남자친구 사이에는 동거를 시작하면서부터 강한 확신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대로 평생 동거해도 문제없겠다는, 이만한 동반자가 더는 없을 것이라는 근거 있는 확신.
지난달 휴가 때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뵙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자친구가 결혼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처음에는 농담 반 진담 반이겠거니 웃어넘겼는데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여러 번 결혼에 대해 언급해 오자 나도 덩달아 진지한 고민에 빠져버렸다.
평소에 꼭 결혼을 해야 한다 주의도 비혼주의도 아니었고 그저 나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피 안 섞인 한 사람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정도로만, 윤곽 없이 흐릿하고 막연하게 동반자를 그리며 살아왔는데 막상 "결혼"이라는 단어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나니 두려움, 의구심, 신기함, 놀라움, 잘 알 것 같지만 동시에 잘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들이 나를 지배했다.
불법체류라는 나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괜한 열등감도 이 감정들에 큰 몫을 더했다. 서류미비자라고 아무 시민권자나 만나는 것이 아니야. 그 누가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해온다고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야. 서류미비자들에게도 결혼은 인생이 걸린 문제야. 나는 나의 결혼을 그 어떠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야. 나는 합법체류 전환 따위에 관심 없으니 그냥 이대로 살 것이야.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남자친구가 "그저 아무나"가 아님을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음에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혼자 온갖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의 프러포즈를 두 번이나 거절했다. 만약 내가 불체자인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단번에 수락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먼저 결혼하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이렇게나 바르고 똑똑한 사람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와 평생을 함께하고자 제안을 해오는데 밀어낼 이유가 있었을까.
미국에 온 뒤 잠깐씩 만남을 가졌던 사람들과는, 정작 나는 그 어떠한 의도가 없이 만났는데 그들이 자꾸 나의 의도를 의심해서 관계를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 반대로, 내가 만나는 사람은 나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데 스스로가 괜한 열등감 때문에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상황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편견에 사로잡혀 배배 꼬아서 생각하는 사람을 멀리하며 지내왔는데 내가 그 꼴이 되어버린 이 상황이 착잡하기 그지없다.
분에 넘치는 행복한 제안을 받아 놓고 온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진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는 요즘의 자신이 원망스럽다.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호의를 호의로, 사랑을 사랑으로만 받아들이는 수련이 나에게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