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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 빛 May 26. 2023

결혼할 결심

2021년 7월 4일_미국에 온 지 704일째

며칠 전, 나와 함께 암벽 등반을 하다가 남자친구가 어깨에 큰 부상을 입었다. 평소에는 안 되겠다 싶은 구간에서는 과감히 포기하고 안전하게 착지하던 그가, 그날따라 유독 안 되는 구간에 집요하게 매달려 있다가 발까지 헛디디는 바람에 어깨부터 땅에 닿으며 예상치 못한 낙하를 하게 된 것이다.



최근 잘 풀리지 않았던 나와의 결혼이야기로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인가, 준비운동을 덜 한 상태에서 오늘의 등반을 시작한 것인가 원인을 따져볼 틈도 없이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우리는 급히 근처 응급실로 향했다. X-Ray와 MRI를 찍고 나서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회전근개 파열(rotator cuff tear)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이 꼭 필요한 상태라 수술날짜를 잡았다.



높은 벽에서 떨어지던 일은 운동 중에 늘 있어왔던 일이고 발을 헛디디는 일도 흔치는 않지만 가끔 있어왔던 일이니 이번에도 큰 문제가 아니겠거니 했는데 이렇게 큰 부상일줄이야. 수술을 진행하는 날 이른 새벽, 그의 유일한 보호자로서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보호자 대기실에서 남자친구의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두 시간이면 끝난다던 수술이 세 시간, 네 시간을 넘어서자 나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보호자의 이름으로 나와 함께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고작 어깨수술에 호들갑을 떠는 유별난 보호자로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순간임에 틀림없었다. 수술은 다행히 네 시간 반 만에 끝났고 나는 남자친구가 마취에서 깨어날 때까지 보호자 대기실에서 두 시간을 더 기다렸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그저 안절부절 다리를 덜덜 떨면서 손톱을 물어뜯었던 보호자 대기실에서의 시간은 그를 향한 나의 마음과 진솔하게 대면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 지금의 건장한 이 모습 그대로 나와 함께 평생 운동하면서 지낼 것만 같았던 그가 이 수술로 갑자기 영원히 어깨를 못쓰게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팔이고 어깨이고 다리가 되어줄 각오가 되어 있다.



- 예기치 못한 실수로 수술도중 그가 피를 많이 흘렸다면? 나의 온몸의 피를 헌혈해서라도 살려낼 것이고 앞으로 살다가 어느 장기를 못쓰게 된다면 간이고 쓸개고 내가 전부 이식해 줄 것이다. 우리는 천만 다행히도 O+로 혈액형도 일치하지 않은가!



- 밤에는 퇴근하고 술 한잔을 기울이며 나와 끊임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그가 이 수술로 갑자기 이 세상에 없게 된다면? 나는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 사람이 결혼상대가 맞는지 아닌지는 이런 극단적인 몇 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금방 답이 나오는 것이었다. 남자친구의 말대로 상대가 합법체류인지 불법체류인지 흙수저인지 금수저인지, 이런 표면적인 조건들은 평생의 동반자를 고르는 데 있어서 아무것도 대변해 주지 못한다. 



그런 조건들은 얼마든지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고 없다가도 생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의 동반자를 고르는 데는 그저 우리 둘이 얼마나 잘 맞고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서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마치 시계가 고장 난 듯 일흔 시간 같았던 일곱 시간이 지나 침상에 힘없이 누워 있는 남자친구와 대면했다.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그의 약한 모습에 마음이 매우 아려왔던 한 편, "이 사람은 평생 내가 지킨다!"는 강한 의지가 솟구쳐왔다. 그동안 나는 왜 그가 얼마나 나를 필요로 하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고 나에게 그가 필요할지만 생각했던 것일까.



참 고마운 사람이다.



내가 가장 별 탈없이 잘 지내던 시절이 아닌, 내가 가장 초라하던 시절 그는 나를 처음으로 만났다. 곧 만기 되어 가는 여권 빼고 내 신분을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던 시절, 모아둔 자산이 하나도 없던 시절, 내로라하는 직업도 잘 나가는 지인도 사랑하는 부모님도 그 아무도 내 옆에 없던 시절, 모든 사람이 기본 옵션으로 갖고 있는 주민등록번호조차 없는 이 시점에 그는 나의 동반자가 되어주기로 나에게 다짐해 왔다.



모든 것을 잃고 가장 약한 모습이 되자 사람들은 종종 내 앞에서 본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이용할 가치도 없고 나를 쉽게 대해도 자신들에게 아무런 불이익이 없을 때, 인간이하의 취급을 해도 무방할 때 내 곁에 남을 사람과 떠날 사람들이 극명히 갈렸다. 내 인생의 그런 시점에 그와 그의 가족은 나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밀면서 뜨겁게 나를 안아주었다.



이제 나도 그와 결혼할 결심을 마쳤다. 이런 동반자 한 명만 평생 내 옆에 있어 준다면 그 어떤 것도 이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돈도, 직업도, 자신감도 모든 것이 원점으로, 아니 원점보다 훨씬 더 멀리 전진할 것만 같다.



무엇이 나를 너에게 데려다주었나 생각해 본다.

생애 첫 직장에서 엘살바도르 무역을 담당하게 된 그 시점이? 멀쩡한 회사에서 퇴사욕구를 느꼈던 그날이? 파리행보다 더 쌌던 뉴욕행 비행기표가? 어느 날 문뜩 암벽등반을 하고 싶었던 그 순간이? 애썼지만 번마다 실패했던 그전 데이트들이? 영화에 조회가 깊었던 나의 아버지께서 감독인 너에게 흥미를 갖게끔 나를 이끌었나?



무엇이 나를 너에게 데려다주었나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느 한순간이라고 특정을 지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너를 만나기 전부터 내가 원하는 길을 향해 쉴 틈 없이 전진해 왔던 내 삶의 조각조각들이 모여 너에게로 나를 데려다 놓은 것 같다.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던 내 삶을 고마움 가득한 보람찬 순간들로 만들어 준 너를 온 마음을 다 해 사랑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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