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 빛 May 10. 2023

결혼이 어렵다

2021년 6월 21일 _ 미국에 온 지 690 일째 되는 날


비록 오랜 기간 만나온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행복지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들 - 취향, 젠더 감수성, 정치 성향, 종교, 에너지, 생활습관들이 마침 너무 비슷했던 나와 남자친구 사이에는 동거를 시작하면서부터 강한 확신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대로 평생 동거해도 문제없겠다는, 이만한 동반자가 더는 없을 것이라는 근거 있는 확신.



지난달 휴가 때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뵙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자친구가 결혼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처음에는 농담 반 진담 반이겠거니 웃어넘겼는데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여러 번 결혼에 대해 언급해 오자 나도 덩달아 진지한 고민에 빠져버렸다.



평소에 꼭 결혼을 해야 한다 주의도 비혼주의도 아니었고 그저 나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피 안 섞인 한 사람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정도로만, 윤곽 없이 흐릿하고 막연하게 동반자를 그리며 살아왔는데 막상 "결혼"이라는 단어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나니 두려움, 의구심, 신기함, 놀라움, 잘 알 것 같지만 동시에 잘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들이 나를 지배했다.



불법체류라는 나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괜한 열등감도 이 감정들에 큰 몫을 더했다. 서류미비자라고 아무 시민권자나 만나는 것이 아니야. 그 누가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해온다고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야. 서류미비자들에게도 결혼은 인생이 걸린 문제야. 나는 나의 결혼을 그 어떠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야. 나는 합법체류 전환 따위에 관심 없으니 그냥 이대로 살 것이야.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남자친구가 "그저 아무나"가 아님을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음에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혼자 온갖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의 프러포즈를 두 번이나 거절했다. 만약 내가 불체자인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단번에 수락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먼저 결혼하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이렇게나 바르고 똑똑한 사람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와 평생을 함께하고자 제안을 해오는데 밀어낼 이유가 있었을까.



미국에 온 뒤 잠깐씩 만남을 가졌던 사람들과는, 정작 나는 그 어떠한 의도가 없이 만났는데 그들이 자꾸 나의 의도를 의심해서 관계를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 반대로, 내가 만나는 사람은 나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데 스스로가 괜한 열등감 때문에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상황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편견에 사로잡혀 배배 꼬아서 생각하는 사람을 멀리하며 지내왔는데 내가 그 꼴이 되어버린 이 상황이 착잡하기 그지없다.



분에 넘치는 행복한 제안을 받아 놓고 온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진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는 요즘의 자신이 원망스럽다.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호의를 호의로, 사랑을 사랑으로만 받아들이는 수련이 나에게는 필요하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가 물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