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귀복 Aug 02. 2024

남자가 믿는 세 가지

사람은 무엇으로 빛나는가

"매력적인 이성에게 호감이 가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이는 부모 막을 수 없다. 부처님도 어렵고, 예수님도 마찬가지. 남녀 모두 특정 조건에 부합하면 교감신경이 자극을 받아 동공이 커진다. 눈치가 빠른 혈압과 맥박은 평균 속도를 높이며 분위기를 맞춘. 이상을 감지한 눈동자는 'N 극'이 되어 'S 극'이 된 이성을 향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이따금씩 아드레날린의 과다한 분비는 사람의 운명도 바꾼다. 수많은 청춘들이 결혼을 고민하고 선택한다. '미혼'에서 '기혼'으로 신분을 바꾼다. 몇몇 욕심 많은 기혼자들은 결혼 후에도 기능을 계속 사용한다. 나 또한 그렇다. 가끔씩 '활성화 버튼'을 누른 채 외출을 한다. 그런 날이면 결국 일이 터진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여성분께 자꾸만 눈길이 간다." 


블라우스와 치마. 하의의 완벽한 조화는 관심 불러일으킨다. 손에 쥐어진 '영롱한 남색 액세서리'가 호감도를 최고조로 높인다. 가까이 다가가 말을 붙여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샘솟는다. 위기를 감지한 '이성'이 '본능'의 멱살을 꽉 쥐고 "류귀복! 여기는 직장이야. 이러면 안 돼!"라고 다그친다. 그럼에도 계속 힐끗힐끗 쳐다보게 된다. 잠시 뒤 운명처럼 완벽한 기회가 찾아온다. 신이 내게 자비를 베푸신 게 분명하다. "OOO 님" 하고 환자를 호명하는데 그녀가 일어선다. "올레!"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곧이어 단 둘이 좁은 촬영실 안에서 얼굴을 마주한다. 이때다 싶은 '본능'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연다.


"혹시, 그 책 제목이 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도서관 책이 그 정도로 해지기가 쉽지 않거든요. 알려 주시면 저도 읽어 보고 싶어서요."


촬영을 앞두고 긴장했던 50대 초반 여성분은 안색이 밝아지며 "선생님도 책 좋아하세요?"라고 되묻는다. 역시 독서인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다. 책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나서 말이 빨라진다. 동족(?)을 만나 기쁜 나머지 TMI 방출의 유혹을 느낀다. "저 사실 작가예요"라는 말이 목구멍을 지나 앞니 바로 앞까지 나온다. 아쉽지만 지금은 업무 중이다. 참아야 한다. 가까스로 홍보 욕구를 억누르고 "네, 엄청 좋아해요"라고 답을 하니,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에요. 저희 목사님이 추천해 주셨어요"라고 밝게 웃으며 알려준다. 소중한 정보를 포스트잇에 적고 있는 와중에 그녀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도 재미있어요. 꼭 읽어 보세요"라는 말을 덧붙이며 또 다른 책을 추천한다. 예상이 맞았다. 그녀에게서 참 독서인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제 최애 책이에요. 종종 읽어요"라고 신이 나서 화답하니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보름달처럼 환해진다. '알토'인 줄 알았던 그녀가 '소프라노'였음을 밝히며, 하이톤으로 말을 잇는다.



"선생님, 그런데 혹시 예수님 믿으세요?"

헉! 나는 예수님을 믿지만 직장에서 종교와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애쓴다. 이는 진리다. 해서 좋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난감한 상황이 분명하. 둘만 있는 공간에서 고객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고민이 깊어진다. 이때 눈치로 먹고사는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정답을 찾는다. 금세 센스 있는 답을 생각해 낸다. 역시 눈동자가 충신이다. 나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를 재현한 뒤, '베이스'를 포기하고 '테너'가 되어 씩씩하답한다.

"하하. 그럼요. 저는 예수님도 믿고, 책도 믿고, 아내도 믿습니다!"

정답을 말한 것일까? 어색할 뻔했던 상황이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건 진심이다. 나는 신과 책, 그리고 아내를 믿으며 살아간다. '신'은 내 삶의 중심을, '책'은 나의 미래를, '아내'는 매일의 행복을 책임진다.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자존감이 급격히 낮아지며 마음의 병이 생긴다. 단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 고로,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세 가지 모두를 지키려 노력한다.


'영롱한 남색 액세서리'의 정체


"그날 점심시간, 식사도 거르고 도서관에 달려가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빌렸다."


직장 도서관은 이용자가 적어 대부분의 책이 새것의 느낌을 간직한다. 책을 찾아 펼쳐보니 속이 너덜너덜하다. 상황을 파악한 입꼬리가 흥분하며 귀를 향해 달려간다. 가득 묻은 손때는 양서의 보증 수표다. 좋은 책이 분명하다. 이제야 알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 마저 느낀다. 설레는 마음으로 오후를 버티고, 퇴근 후 30분 자유시간을 이용해 안방 침대에서 책을 펼친다. 덕분에 건조했던 눈이 인공눈물의 도움 없이 촉촉해진다. 독서 5분 만에 한 방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역시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정될 만하다. 짧은 글의 여운이 만리장성보다 더 길다. 책을 덮은 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속에 온기가 은은하게 남아 다.


"좋은 책을 접하고 나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가진 것에 대한 감사함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평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나 역시 그렇다. 두 눈으로 책을 읽고,  손으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오늘이 분명 멋진 선물인데 더 큰 무엇을 바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고 나오니 거실에 있는 모녀가 평소와는 확연히 달라 보인다.


"사람은  것보다 실천하는 게 더 중요하."


배운 걸 실행에 옮길 시간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다가가 양 볼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눈동자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자기 갑자기 왜 그래?"라고 반응하는 아내도 싫지 않은 눈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여인 눈동자는 연한 갈색이다. 헬렌 러가 남긴 글이 아니었다면 나는 시력을 잃었을 때 아내의 눈동자를 정확히 떠올리지 못했을 듯싶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를 기억하는 기쁨이 일상에 행복을 더해준다. 그렇다. 내게는 지혜로운 아내와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순수한 딸이 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잠을 자는 오늘보다 더 큰 선물은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는다. 역시 좋은 책은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위대한 힘이 있다.


.
.
.
.
.
.
.
.



매일 퇴근길, 나의 교감신경은 활동을 준비하며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헛둘헛둘. 관문을 열자마자 동공이 커진다. 눈치가 빠른 혈압과 맥박은 속도를 높이며 아내가 앞에 있음을 알린다. 아드레날린이 계속 분비되면 운명이 바뀐. 함께 있는 아이가 예쁘긴 하지외벌이 가장에게 둘째는 부담이다. 어쩔 수 없이(?) '이성'이 '본능'을 이기도록 응원해야 될 듯하다. 흑흑.





비하인드 스토리


작년 여름, 5개월 간 정성스레 쓴 원고를 반년 가까이 투고하면서 큰 좌절을 겪었다. 100곳이 넘는 출판사로부터 계속 거절을 당하고 있으니 안 하던 기도를 다 하게 된다. 퇴근길 차 안에서 핸들을 꽉 붙잡고 "하나님, 책을 출간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며 귀가한 어느 날, 잠든 6살 아이가 토를 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까지 이어지니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다. 호들갑을 떨며 아내에게 "빨리 응급실 가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말한다. 아내는 차분하게 "가면 애만 더 고생해. 열 안 나니까 지켜보다가 아침에 소아과로 가자" 하고 답한다. 토는 열 번을 넘어 열세 번까지 이어졌다. 아내는 그날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아픈 딸을 토닥였다. 나는 힘이 빠진 아이를 안고 정말 오랜만에 아주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서아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저 책 출간 안 해도 되니 제발 서아만 건강하게 자라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했다. 이튿날 아침, 아이는 장염 약을 처방받았고, 다행히 며칠 후에는 완전히 회복해서 "아빠, 씨름하자!"를 외쳤다.


'딸기 라떼'를 좋아하는 '7살 딸'과 함께 카페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과 아픈 딸을 밤새 간호하는 아내, 틈틈이 읽을 책이 있다. 세 가지를 믿고 사는 남자에게는 머무는 모든 공간이 곧 천국이다. 


"신의 삶은 무엇으로 빛나는지 묻고 싶다."

이전 08화 그래, 육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