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시장비빔밥
시장비빔밥은 익산 황등풍물시장 옆에 있다. 1945년 개업하여 4대째 대를 잇고 있다. 밥이 비벼져 나오는 육회비빔밥이 대표 음식이다.
육회비빔밥 보통 1만 1천 원, 곱빼기는 1만 3천 원이다. 선지순대국밥(9천 원), 모듬순대(1만)도 판매한다. 영업시간은 11시~14시로 하루 3시간만 장사한다. 일요일은 휴무이다.
익산역에서 39-2번 버스를 타고 황등비빔밥을 먹기 위해 황등면으로 향한다. 30분이 좀 넘게 걸린다. 버스 안에서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진미식당은 두 차례 들렸고, 시장비빔밥도 2016년 찾은 적이 있어서 가보지 않은 황등파출소 전 한일식당을 가볼까 생각하다 마음을 접는다. 토렴하는 식당에 대한 글을 쓰고 있어 시장비빔밥으로 마음을 정한다.
이번 정류장은 황등파출소란 안내 소리가 차가운 에어컨 공기 사이로 흐른다. 찻길 오른쪽으로 한일식당이 보인다. 눈에 담고 다음 정류장인 황등면사무소에 내린다. 10시 29분이다. 정류장에서 시장비빔밥까지 200m 정도 걸어간다.
황등풍물시장을 좌측으로 접어들 때 버스에서 같이 내렸던 여자분이 뛰신다. 시장비빔밥 건너 건너 커피집까지 30여m 손님들이 줄을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보니 10시 31분이다. 여자분 뒤로 줄을 선다. 줄을 선 분들 얘기를 들으니 며칠 전 방송에 나와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방송의 힘이 큰 걸 새삼 확인한다.
2016년 처음 찾고 2024년 7월, 다시 찾았다. 8년 만이다. 첫 방문 때도 줄을 서지 않았다. 시장 주변 식당들 들리며 줄이 길게 선 건 처음 본다. 시장 주차장에도 자가용들이 장애인, 경로우대 자리까지 주차할 정도로 꽉 찼다. 늦게 온 손님들은 주차할 곳을 찾아 시장 밖으로 나간다.
여자분 앞에 줄 선 중년 남자분이 뛰어온 여자분에게 먼저 말을 건다. 어디서 왔는지 묻는다. 남자분은 대전에서 여자분은 전라도 광주에서 오셨다. 자연스럽게 음식 얘기들을 나눈다. 두 분 다 전국적으로 식당들을 찾아다닌다며 정보들을 공유한다. 황등비빔밥은 방송을 보고 처음 왔다고 한다. 먹는 데 진심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 뒤 익산 사신다는 여자분들이 두 분 다 대단하시다고 추켜세워 주신다. 그분들의 말도 진심으로 들렸다.
개점 시간은 아직 29분 남았다. 그나마 커피집 지붕이 앞쪽으로 길어 7월 말 태양 빛을 가려줘 다행이었지만 등에는 땀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다. 10시 58분 출입문을 밀고 나온 인상 좋은 남자분이 손님을 받기 시작한다. 대기 줄은 식당 우측 끝 전봇대에서 끊긴다. 태양을 피할 가림막이 없다. 팔에 닿은 태양 에너지는 진미식당 뜨거운 그릇에 덴 옆 손님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후텁지근하다. 등엔 땀이 더 흐른다. 태양은 땀도 말릴 기세로 뜨겁다. 간혹 구름이 흐려지며 어쩌다 바람이라도 조금 불면 집에서 찬물로 샤워한 느낌이 든다. 잠시뿐이지만...
식당에서 손님들이 조금씩 나오고 내 앞쪽으로 줄 선 분들이 그만큼 식당으로 들어간다. 회전율은 빠르다. 11시 26분 식당 출입문 부근에 다다른다. 내 앞 남녀 두 분은 아직도 음식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남자 손님의 제안으로 두 분이 합석하기로 한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도 55분 만에 입을 열어 “저도 같이 해도 될까요?” 물어본다. 두 분의 동의를 얻어 3명이 함께 자리하기로 한다.
말을 마치고 식당을 살펴본다. 가건물 같은 허름한 식당의 외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출입문 위 지붕에 시장비빔밥 상호가 적힌 간판이 새로 달렸고 방송에 소개된 스티커도 붙어 있다. 유리창에 선지국밥, 비빔밥, 순대 등 메뉴가 다른 색깔로 쓰여 있는 건 8년 전과 다름없다. 상호 옆 좌측으로 미는 빨간 화살표가 그려진 미닫이식 출입문도 변함없다. 화살표 위에 영업시간과 휴무일이 적히고, 좌측으로 줄 서는 손님에 대한 감사와 포장 손님에 대한 안내를 쓴 글이 적혀 있다.
11시 27분 안내 글을 다 읽을 때쯤 미닫이문이 열리고 몇 명인지 묻는다. 합석하기로 한 우리 차례였다. 내 앞에 선 남자 손님이 3명이라고 대답한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서 좌측 맨 끝 구석진 4인 좌식 식탁으로 안내받고 앉는다. 주문도 바로 받는다. 남자 손님은 육회비빔밥 곱빼기를 시키며 서로 맛보자며 모듬순대도 주문한다. 버스에서 같이 내렸던 여자 손님과 나는 육회비빔밥 보통을 주문한다.
주문 후 옆에 놓인 수저통에서 수저를 나눠 드리고 식당을 훑어본다. 8년 전보다 깨끗해지고 앉을 자리가 늘어난 듯하다. 떠들썩한 대폿집 분위기는 남아있다.
역대 주인장들의 사진 밑으로 방송 출연 사진, 명패, 사인들이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메뉴판도 살펴본다. 메뉴는 육회비빔밥, 선지순대국밥, 모듬순대 3가지로 단출하다. 국내산 식재료를 사용하고 포장 가능하다는 문구가 눈에 띈다. 파란색으로 크게 쓴 ‘물 셀프’ 글자가 도드라지지만, 물통도 가져다주었다.
5분쯤 지나 모듬순대에 깍두기, 김치, 새우젓을 곁들여 내준다. 모듬순대는 피순대와 돼지 내장이 섞여 있다.
피순대는 돼지 대창에 선지로 속을 가득 채웠다. 채소의 쓰임도 눈으로 보인다. 큼직한 피순대를 입에 넣고 씹는다. 돼지 대창이 졸깃하게 어금니를 놀리고, 촉촉하고 진득한 선지가 부드럽게 혀를 감친다. 신선한 피 맛이 고소한 호남의 수제 피순대다.
곱창, 허파, 돼지 귀, 새끼보, 간 등속도 맛본다. 다른 식감과 맛을 내는 돼지 내장을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빔밥이 나오기 전 검은 뚝배기에 선지와 썬 파를 얹은 선짓국을 먼저 내준다. 흐릿한 갈색 국물을 몇 수저 떠먹는다. 8년 전보다 국물이 자극적이지 않고 삼삼하다. 오랜 시간 끓여낸 육수에 돼지 내장, 토렴한 밥과 채소 등이 뿜어낸 국물 맛이 깊고 구수하다.
띄엄띄엄 구멍이 난 선지도 조금 잘라 맛본다. 탱탱함은 오롯이 어금니에 전달되며 피비린내 없는 신선한 맛을 그려낸다. 남은 선지는 아껴두고 국물만 한술 떠먹을 즘 육회비빔밥이 나왔다.
손님들이 식사하는 공간 오른쪽으로 열린 주방이 보인다. 손님과 주방은 서로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경계에 화산의 분화구 같은 검고 큼지막한 무쇠솥이 놓여 있다. 무쇠솥에는 여릿한 갈색빛을 띠는 육수가 폭발할 듯 하얀 김을 모락모락 뿜으며 끓고 있다. 그 속엔 육수보다 진한 갈색빛의 피순대와 뚜렷한 분홍빛의 커다란 선지덩어리가 돼지 육수에 스며들고 있다.
무쇠솥 주위에선 분배와 규칙적인 동작으로 음식을 만들어낸다. 무쇠솥 국물은 국밥과 비빔밥용으로 동시에 사용된다. 왼쪽에선 선지순대국밥용 돼지 내장이 담긴 검은 뚝배기에 토렴하고 오른쪽에선 육회비빔밥용 콩나물이 얹힌 식은 밥을 큰 체망에 넣고 돼지고기 육수, 선지, 피순대가 뒤섞인 무쇠솥 국물에 담가 국자로 누르며 토렴한다. 열을 고루 전달하는 무쇠솥은 식재료들 본연의 질감을 살리면서 부드럽게 익혀준다.
적절한 온도를 맞추는 토렴은 경험자의 몫이다. 경험에서 우러난 연륜이 담긴 손길은 날래면서도 느긋하다. 노포의 토렴질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토렴한 밥과 콩나물은 큰 양푼으로 옮겨지고 숙성 고추장 양념을 넣어 골고루 비빈다. 비빈밥 적당량을 스테인리스 그릇에 던다. 애호박과 무나물을 한쪽에 담고 돼지비계와 양념 파채와 함께 버무린 육회도 비빈밥 위에 올려준다. 참기름을 뿌려 마무리한다. 육회비빔밥이란 이름으로 판매하는 익산 황등 비빈밥이 완성된다.
육회비빔밥이 만들어지는 고된 과정을 눈과 코와 귀로 느낀다. 열린 주방에서 노련한 경험자가 보여준 신뢰는 맛의 기대치를 한껏 올려준다.
얼마 전에 고인이 된 음식 칼럼니스트 황광해 씨는 토렴에 대하여 "밥과 국물, 밥 퍼주는 이와 밥 그릇 그리고 먹는 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전제된 밥상 차림이라고 하며 토렴을 그리워했다." 시장비빕밥에서 그가 그리워한 토렴을 가슴에 사무치게 담는다.
주문한 육회비빔밥이 각자 자리에 놓인다. 앞에 앉은 여자분과 나는 보통이고 옆자리 남자분은 곱빼기다. 슬며시 보니 곱빼기는 밥의 양보다는 육회의 양이 많아 보인다.
2016년 맛본 사진을 보며 추억의 맛을 되새긴 후 자리에 놓인 육회비빔밥을 찬찬히 훑어본다. 담음새가 한 달 전 맛본 진미식당에 비해 투박하다. 채소들로 색은 냈지만, 빨간 육회의 양이 많아 묻힌다. 푸른 시금치 무침은 보이지 않고 파무침과 함께 버무려진 육회의 색감은 예전보다 덜 자극적이다.
한 달 전 맛본 진미식당의 비빈밥과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밥을 미리 비벼 내주고 토렴하고 고추장 양념과 육회를 사용하는 점은 같다.
제일 큰 다른 점은 비빈밥의 온도 차이다. 진미식당은 비빔밥을 뜨겁게 달궈 내서 토렴만 한 시장비빔밥보다 따뜻하다.
진미식당은 고명으로 청포묵과 메주콩을 사용하고 시장비빔밥은 육회에 돼지비계와 파채를 섞는 점도 다르다.
젓가락으로 육회를 슬쩍 옆으로 밀어낸다. 고추장 양념에 비벼진 빨간 밥알 위로 하얀 몸통과 노란 대가리가 달린 콩나물이 드러난다. 빨강 속에서 하얀 무나물이 돋보인다.
채소 고명과 육회를 비빈밥과 다시 섞는다. 열린 주방에서 한번 손님이 두 번째 비빈다. 한 수저 크게 떠먹는다. 빨간 양념은 보기보다 자극적이지 않고 간을 맞춘다. 걸쭉한 육회는 어금니에 살강살강 씹히고 알싸한 파채 사이에 숨은 돼지비계는 고소한 지방의 맛을 더한다. 콩나물은 어금니가 기억하는 아는 식감을 토렴한 밥은 촉촉하고 구수하다. 토렴하지 않은 육회의 양이 많아 전체적으로 온도가 낮은 듯하다. 숟가락질은 몇 번 더 이어진다. 풍성한 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선짓국을 한술 뜨고 아껴둔 선지를 비빈밥에 얹어 손톱 크기로 잘라 다시 비빈다. 세 번째 비빈다. 선지의 진득하고 고소한 맛과 식감은 비빈밥의 풍미를 한층 끌어올린다.
밑반찬으로 나온 깍두기와 김치는 먹지 않았다. 선짓국과 여러 식재료가 담긴 비빈밥 자체만으로 충분했다. 젓가락이 필요 없었다.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날것도 익힌 것도 아닌 그 중간 항(項), 자연과 문명을 서로 조합하려는 시스템 속에서 음식을 만들어 낸 것이 비빔밥"이라며 비빔밥을 '맛의 교향곡'이라고 했다.
시장비빔밥의 육회비빔밥도 날고기 육회, 토렴한 밥과 채소, 고추장 양념, 시행착오를 거쳐 넣은 파무침과 돼지비계 등 각각의 식재료가 한데 섞이며 새로운 맛을 만들어냈다.
시장비빔밥의 육회비빔밥은 검이불루(儉而不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비빈밥이다. 수수하지만 깊이가 있는 음식이다.
고 황광해 씨는 “진귀한 식재료가 아니라 음식에 대한 진정성 있는 조리법이 최고의 음식을 만든다”고 했다. 그의 글을 떠올리며 마지막 한 숟가락을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다. 토렴하는 모습이 가슴에 남실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