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모두 지나갔다.
아버지는 교모세포종이었다. 이름이 길고 난해한 희소병이 아닌 이상, 통상적으로 알려진 병중에 가장 높은 5년 내 사망률을 가진, 달리 치료하는 대상이 되지 못하는 병이다. 병원도 나도 누나도 이것을 치료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아버지 머릿속에 자라는 종양은 일 년 내에 아버지의 많은 것을 잠식해 더는 생각도 의식도 없게 만들 것이다.
조직검사를 마치고 우리 집에 있는 동안 방사선 치료를 했고, 이어서 항암치료를 했다. 항암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복용방법으로 약을 먹으면 되었다. 다행히 그 기간 동안 아버지는 극심한 고통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방사선과 항암 치료는 눈에 띄게 빠르게 떨어졌던 아버지의 인지와 운동을 느리게 회복시켰다. 아버지는 다시 부축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오른쪽 다리를 좀 절고, 걸을 때마다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아버지가 우리 집을 떠나고 누나는 아버지에 맞는 병원을 찾아다녔다. 아버지에게 맞는 병원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병원은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적막하거나, 너무 도심 속에 있어서 답답했으며, 적당한 곳에서는 맞는 병실이 없었다. 암요양병원을 소개해주는 앱도 찾아보았다. 그곳은 통상 월에 1천만 원까지 비용이 드는 최고급 암 조리원을 소개해주었다. 돈을 떠나서 암 요양병원에서는 아버지처럼 정말로 중증인 환자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곳은 아직 상대적으로 건강하며, 지지하는 가족구성원과 재력이 있고, 회복의 여지가 크며 인지가 충분한 환자들이 '암'이라는 나름대로는 흔한 질병을 맞이해 머무는 조리원에 가까웠다.
한겨울에 아버지는 두 군데의 요양병원을 지나 요양병원으로는 세 번째, 전체의 투병으로 보자면 일곱 번째 병원으로 경기도 광주의 병원에 입원했다. 그곳은 도심처럼 시끄럽지 않았지만, 산속의 요양병원처럼 적막한 죽음의 공기에 싸여있지도 않았다. 재활을 전문으로 하는 내부의 학교시설은 병원에 적당한 활기를 넣어주었고, 이층의 적당히 낡은 벽돌 건물은 살던 집을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의 병실은 겨울에도 볕이 잘 들었다. 창으로 햇살이 뿜어져 들어왔고, 그동안의 어떤 병원보다 쉽게 창밖을 볼 수 있었다. 겨우 머물만한 병원을 찾게 되었을 때, 지친 누나는 집으로 돌아갔고 아버지는 간병인과 함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봄을 맞이했고, 여름을 지나, 단풍이 들고, 단풍이 떨어지는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와는 매주 병실에서, 또는 병원 밖 정원에서, 짧은 면회 시간을 보냈다.
그곳의 봄은 벚꽃이 아름다웠고, 우리는 꽃놀이를 하듯 쏟아지는 벚꽃을 맞으며 산책했다. 아이는 병원에 갈 때마다 노랑, 초록, 보라, 빨강으로 칠해진 바닥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뛰어다는 것을 좋아했다. 뛰는 손녀를 보며 아버지는 활짝 웃었다. 아버지는 빵이나 과일 같은 간식부터 김밥이나 닭강정 같은 식사까지 다 잘 먹었다. 주말이면 이번 아버지 면회에는 어떤 음식이 새롭고 반가울지 고민했다. 설렁탕을 한번 사가볼까. 만두를 맛있게 먹지 않을까 하며 손에 먹을 것을 들고 잰걸음으로 할아버지 방을 찾는 딸을 앞세워 아버지를 찾았다.
여름은 해가 길었다. 금요일에는 회사를 일찍 마치고 혼자 찾아갔다. 아무리 일찍 나가도 막히는 도로에 일찍 도착하기 어려운 나는 항상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게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면, 병원 앞 정원에서 아버지와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다치기 전, 아버지는 나만 보면 말이 많았다. 결혼하고 보는 일이 적어지자 더 많았다. 내가 어릴 때는 아버지는 말이 많지 않았다. 어리지 않은 나는 아버지가 많은 말을 하면 늘 항상 건성으로 대답했다. 피곤하다, 좀 쉬어야 한다. 정도의 말을 하면, 아버지는 어서 쉬라고 했다. 평생을 힘든 일을 해온 아버지는 회사 가서 일을 하는 것이 몸이 축나는 일인 마냥 말했다. 아버지가 다치고 얼마 안 되던 급성기 환자 시절, 아버는 하루종일 전혀 통하지 않는 말을 끝없이 했다. 그렇게 시간이 일 년쯤 가까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말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말을 다소 좀 적게 하는 아버지였다. 아픈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난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볼 때면, 아버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는 말을 하지 않고 해가 점점 작게 잘려나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여름이 지나면 아무리 일찍 출발해도 해가 지는 것을 보기 어려울 것이었다. 여름이 지나면 해가 지는 것은 영영 함께 보기 어려울 것이었다.
가을에는 뒤뜰 산책로를 따라 가을꽃들이 여럿 피었다. 나는 산책로에 핀 가을꽃들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관심을 끌어보려 했지만 아버지의 시야에는 그것이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가을의 아버지는 휠체어에 탄 채로 졸았다. 이제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는 아버지를 위해 한쪽에 담요를 대고 조는 아버지에게 '이 꽃은 뭐예요.' '날씨가 선선해졌네요.' 같은 말들을 건넸다.
이른 겨울, 흩날리는 첫 눈발을 아버지는 창가에서 바라보았다. 나는 그것을 간병인이 보내준 사진으로만 봤다. 아직 날이 추워지기도 전에 날리는 눈발을 나는 회사에서 보았다. 몇몇 사람들이 눈발이 내리는 창밖을 보며 첫눈이라고 말했고 나는 문자로 첫눈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사진을 받았다.
그리고 날이 제법 더 쌀쌀해질 즈음 나는 아버지가 없는 병원에 갔다. 이제는 다시 어디로 가져갈 일이 없는 짐들을 챙기러 갔다. 봄에 꽃잎이 눈발처럼 날리던 벚꽃들은 어느새 잎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가 처음 병원에 올 때처럼 앙상한 가지로 남아있었다. 문득 아버지를 차에 태우고 이곳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리고 이어서 봄날의 벚꽃 속에 환하게 웃던 때와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던 자리를 생각했다. 계절이 모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