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조금씩 깎이고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남은 생의 일 년은 짧지만, 사실 일 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나와 누나는 한 달이 머다 하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야 했다. 그때마다, 그 전의 상황들은 나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시한부의 일 년 동안 깎이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며칠간, 몇 주간, 이제는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 단계가 지속된다. 그러다 문득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회사에 있는 동안에 갑자기 아버지가 인지를 잃고 섬망 속에 소동을 벌인다든지, 늦은 밤 화장실에 가다가 문득 다리가 마비되어 쓰러진다던지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와 누나는 뒤늦게 병원으로 찾아가 서로가 어떻게 휴가를 내고, 어떻게 병실을 지킬 것인지 계획을 짜고 번갈아 아버지를 간호한다. 며칠간 스테로이드를 맞고 급한 부종이 가라앉으면 퇴원을 하고, 돌아오면 아버지는 전에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씩을 잃어버린다. 한번 잃어버린 것을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부축 없이 걷는 것을 잃었고, 시야를 조금 잃었고, 자리에서 버티고 앉는 것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어떤 국면에서는 음식을 삼키는 것을 잃어버렸다.
많은 이들은 음식을 삼키는 것에 어떤 기억이 필요하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을 것이다. 태어나서 돌이 채 지나기 전에 아기 숟가락의 반만큼 미음을 담아 그것을 삼키는 연습을 했었다는 것은 보통 기억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의 일이다. 아버지는 태어나서 배우는 모든 것들을 반대로 잊어갔다. 그리고 그것이 무언가를 삼키는 것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크게 깎이고 저물었다. 하루에 세 번 음식을 씹어 삼키는 것, 그것은 태어난 지 채 1년이 되기 전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삶이 끝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된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밥을 먹는 것은 살아 있는 것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처음 식사를 잘 못 넘긴다는 소리를 듣고, 주말에 나는 곱게 간 추어탕을 사가지고 아버지를 방문했다. 나는 아버지가 평소에 좋아하던 추어탕이 아버지의 식사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버지는 역시나 그것을 반가워하였으나 시원하게 먹지는 못하였다. 좀처럼 삼키지 못하고 입에서 우물우물거리다가는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뒤늦게 그것을 삼켰다. 나는 아버지가 잘 드시지 못한다는 게 간병인의 엄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의 추어탕을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더는 밥을 드시진 못하였다.
병원에서는 원래는 식사로 나오는 반찬들을 다 곱게 갈아서 내주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초록색과 주황색과 노란색 국물들은 원래는 밥이었던 하얀색 국물과 함께 원래 나오던 그릇들에 담겨 나왔다. 아버지는 나랑 같이 있을 때 가장 식사를 잘했다. 나는 하얀색 국물 위에 초록색이나 주황색 국물을 조금씩 섞어 한 숟가락씩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입에 그것을 담고 좀처럼 넘기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아버지! 드셔야 해요! 꾸울꺽! 드셔야 해요! 꾸울꺽!"
나는 온갖 몸짓과 함께 소리쳤다. 그렇게 처음 한술을 삼키면 식사를 시작한 지 20여분이 지나있었다. 나는 그다음 숟갈을 노란색 국물이나 초록색 국물을 섞어 다시 아버지에게 드리고 소리쳤다.
"드셔야 해요! 드셔야 해요!"
그렇게 소리치는 한 시간은 서글픔이 있었다. "드셔야 해요!"라는 소리는 "사셔야 해요"라는 소리침과 같았다. 아버지가 채 출생신고를 하기도 전에 배웠을 이 삼킴은 아버지의 삶이었다.
아버지는 가리는 것이 없이 다 잘 드셨다. 음식에 까탈스럽지 않은 것은 입맛인지, 아니면 음식을 하는 것에 대해 탓하지 않는 집안의 분위기였는지 모른다. 그 분위기조차, 원래 그랬던 것인지 다른 집과 달리 밥을 하고 반찬을 할 사람이 적었던 우리 집의 사정 때문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 나이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지금의 나보다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는 엄마가 없었으므로, 나는 할머니 밥을 먹고 자랐다. 할머니가 서울에 있는 아버지는 먹이지 못해서 밥을 해 먹는 것은 아버지가 혼자 해결해야 하는 평생의 일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곧잘 요리를 했다. 절인 배추로 만드는 배추김치뿐 아니라, 뭔가 먹을만한 채소면 쉽게 버무려 김치를 만들었고, 집에 있는 몇 가지 양념이면 손쉽게 볶음 요리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다만, 맛 이외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아버지의 요리는, '잘 만들었다.'는 느낌보다는 '먹어보니 생각보다 괜찮은데'에 가까운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음식을 해서 함께 먹지 않았다. 사춘기가 지나 같이 살게 된 스무 살, 스물한 살 아들 딸을 먹이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아버지가 오징어 볶음이나 카레 같은 것들을 해서 후라이팬에 담긴 그대로 가스레인지 위에 놓아두면 일곱 시나 여덟 시, 늦으면 열시나 열한 시쯤 들어오는 내가 무심히 그것을 먹고 남은 것은 그째로 냉장고에 두었다. 그러면 다음날에는 이윽고 아버지가 남는 것을 먹었다. 때로는 하나도 손대지 않고 남은 것을 먹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조금의 대면도 없이 누나와 나를 먹였다. 무엇을 해도 먹어라 말하지 않았고, 함께 모여 앉아 먹지 않았다. 다만, 내가 먹는 이 반찬에 손댄 흔적이 없는 것을 보고 나와 누나가 먼저 먹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았고, 아버지는 남은 반찬의 양을 보고 나와 누나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알았다.
그리고 나는 숟가락에 담긴 하얀색 물을 아버지에게 먹였다. 이것을 삼키지 못하는 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회귀를 의미했다. 콩자반이 되었든 내가 남긴 오징어 볶음이 되었든 아버지가 혼자서 밥을 먹었던 그 오랜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을 말했다.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아버지에게 소리쳤고, 아버지는 몇 술 드시지 못했으나, 우리는 병원에서 권하는 콧줄 대신에 한 시간씩 소리를 지르는 식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어느새 아버지가 콧줄을 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힘들어했다. 떨어진 인지력 덕분에 촉감도 둔해졌는지 어지간한 주사나 치료, 수술에도 큰 반응이 없었던 아버지는 콧줄을 갈 때만큼은 어려워했다. 투명한 플라스틱 호스를 별다른 처치 없이 식도를 지나 위까지 집어넣는 일은 마음 약한 누나를 엉엉 울게 만들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콧줄을 넣는 것만큼 슬픈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아버지가 반가워할 무엇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금요일 저녁의 면회에도, 주말의 면회에도 더는 아버지에게 사갈 것이 없었다. 어떤 물건으로도 아버지를 위로할 것이 없다는 것이 서글펐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활짝 웃는 딸과 같이, 아버지는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삶에 마지막에 이르러 아버지에게는 그토록 열심히 일해 모았던 어떤 것도 아닌, 나와 누나만이 남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도 아닌, 나만이 남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저물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종종 아버지와 병원에서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생각했다. 그것들은 대체로 먹는 일들이었다. 나는 일 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먹었던 음식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낼 수 있다. 동태찌개, 김치찌개, 능이백숙, 굴비백반, 해물덮밥, 두부전골, 찐두부, 보리밥... 아버지가 그것들 중 무엇을 기껍게 먹었는지, 숟가락과 젓가락을 끝없이 떨어뜨리면서 어떤 반찬들에 더 손이 갔는지를 기억할 수 있다. 이른 새벽 냉장고에 남아있는 반찬을 보고 나나 누나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짐작하는 것과 같이, 나는 그제야 아버지가 두부를 꽤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두부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나만은 평생을 기억할 일이다. 시한부의 일 년은 짧다. 누군가는 금방 가버렸다고, 너무 일찍 가버렸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 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밥을 먹는 일이 있는 한, 일 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