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발적인 바쁨이라는 것, 자발적인 바쁨, 이 바쁨이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이전의 바쁨과는 판이하게 다른 새롭고 즐거운 바쁨, 하루 24시간이 예전의 나에게도, 지금도 나에게 똑같이 주어지고 있음에도 예전의 24시간이 너무나 힘들고 곤혹스러웠다면 지금의 24시간은 너무나 즐겁고 아쉬웠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어버렸네
좋아하는, 하고 싶은, 누군가 통제하지 않고 스스로 계획하는 시간을 하루하루 보내다 보니 아등바등 보내왔던 예전의 그 시간들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참, 별일이다.
맡은 일은 반드시 마무리 짓고, 그 결과물까지 좋아야 한다며 스스로를 닦달하며 몰아세웠던 그때에서 고작 며칠이 지났다고 이제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이 아쉽고, 안타깝기까지 하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새록새록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쯤 '만년필'이라는 신비로운 세계가 내 앞에 펼쳐졌다. 만년필로 글씨를 쓴다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이보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만년필은 아주 오래전 사용했던 필기구가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사용되고 있는 필기구였다.
이런 만년필로 글씨를 쓰면 술술 써질 것만 같았다.
'만년필로 글씨 쓰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는 이들은 책을 필사하기도, 일기를 쓰기도 한다.'
만년필이라는 신비로운 세계를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좋은 책이 있을까 하여 찾았던 서점 한편에 만년필 매대가 있었다.
"어, 만년필이 아직도 있네!"
신기하기도 새롭기도 했다. 해묵은 사진첩에 가끔씩 등장하던 만년필이 내 눈앞에 있다. 고가의 만년필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중후함을 뽐내며,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녀석들을 보니 갑작스럽게 한 자루 갖고 싶어 졌다. 하지만, 나는 만린이가 아닌가
한참을 만년필 매대를 서성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에 이것저것 만년필에 관한 것을 찾아보았다. 역시 내 생각이 옳았다. 섣불리 덤벼들었다면 만년필이란 녀석에게 멋지게 한방 먹었을 것이다.
만년필은 획의 굵기에 따라 EF, F, M, B로 나뉘었으며, 잉크를 주입하는 방식도 다양하였다. 컨버터 혹은 카트리지 방식인지, 피스톤필러 방식인지, 또한 잉크의 종류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혼란스러웠지만, 묘한 끌림이 있었다.
"모르겠다, 입문용 만년필이라고 불리는 녀석을 한 자루 입양하자!"
가만히 앉아 고민하는 것보다는 맞부딪혀보자라는 생각이 강했던 나였기에 파커 조터 만년필 한 자루를 입양했다.
'이 파커 조터 만년필 입양을 시작으로 1년 여가 지난 지금 20여 자루 가까운 만년필들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면 나는 만년필 사랑꾼인가?'
며칠 후 잉크와 함께 도착한 녀석은 고급스러운 불펜 같았다. 잉크를 넣어 차분히 하루 일과를 정리해 보았다. 사각사각 종이를 긁으며,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간다.
아!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각사각 한 글자, 한 글자를 써나갈 때마다 종이를 긁으며 나는 소리와 손끝에 전해지는 그 감촉은 나에게 새로웠고 신선했다. 이렇게 나는 책 읽기, 자격시험 준비하기, 만년필 탐구하기까지 일 이외 다른 모든 것에 관심이 없던 나에게 하나, 둘 좋아하는 것들이,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며,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며 촉촉이 적셔나가듯, 척박한 나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