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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온Haon Apr 17. 2023

나는 평안했다. 내 인생에서 그를 덜어내니

10. 아픈 손가락은 필요 없어

(9편에 이어서)


그는 마치 우리의 약속이 가까운 친구와 지나가듯 잡은 약속인 마냥 ‘다음에 만나요’라고 했다.


기가 찼다. 다음? 그는 왜 우리에게 다음이 있다고 생각한 걸까.


도대체 그의 머릿속은 어떻게 생긴 걸까.


그에게 다음은 없음을, 이게 끝임을 알려줘야 했다.


그에게 카톡을 보냈다.

네.. 요즘 많이 바쁘죠. 건강 생각해서 일하고요.
마지막이라고 생각돼서 인사하러 갔을 때 반갑게 받아줘서 고마워요. 내 마음 편하자고 용기 냈던 거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했거든요.

오늘 만났으면 우린 무슨 말들을 했을까 생각이 드네요. 우리의 마지막 이후부터 지금까지 당신한테 마음이 안 쓰인 적이 없고, 매일 보는 직원들 입에서 당신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 같은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프면서, 당신의 상황이 더 나아지기 위해 나와 헤어지는 결정을 해놓고도 더 나아지지 않는 당신한테 화가 나는 내가 너무 못된 사람이 된 것 같고, 이런 여러 감정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해서 그래서 도망가는 거라고 하소연을 하게 될까.. 근데 난 오늘은 당신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동안 내가 제일 마음이 아팠던 건 당신이 지금 이렇게 힘든 상황을 누구한테는 말하고 있을까였어요. 만나는 동안에 내가 잘 들어주진 못했지만, 그런 나를 붙잡고 힘들다고 털어놓던 당신이었는데, 그때처럼 누구한테라도 털어놓는다면 다행이겠다. 누가 당신이 힘들다고 하는 걸 좀 들어주고, 이해해 주면 너무 당신한테 힘이 될 텐데..

밥 먹자고 한 게 쉽게 한말은 아닐 거라 생각해요, 당신 나름대로 용기 내서 보자고 했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 당신의 마음도 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음은.. 모르겠어요. 나중이 되어서도 난 또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게 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연락하기에는 어려울 거 같아요, 이해하죠? 난 당신 뜻대로 평안하게 잘 지낼 거예요. 그러려고 내린 결정이니까. 문득 생각나는 우리의 순간들은 내가 감당할 몫이고, 이제는 당신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곳도 없고, 기회도 없으니까.

당신이 스스로를 돌보고, 마음적으로 여유가 생겨서, 주위를 돌아볼 수 있게 되는 때가 되면, 그때 다시 봐요. 같이 일하면서 많이 배웠었고, 좋았던 순간들을 만들어줘서 고마웠어요. 언제나 그랬듯이 응원할게요.

모든 말들이 진심이었다. 마지막인 마당에 가식을 떨고 숨길 이유가 없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고 하는 그에게 그냥 ‘알겠어요’라고 말하고 말까 고민도 했었다. 헤어진 마당에 구구절절한 말들을 전하는 게 맞는가? 사실 말하지 않아도 나의 마음을 알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섬세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아마 약속을 취소한다는 카톡을 보내놓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일에 집중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헤어지고 5개월 동안 그에게 생겼던 여러 감정들과 오늘 그가 나에게 한번 더 실망을 안겼던 행동에 대해 짚어줘서 그가 한 행동은 굉장한 실례였음을 알려줬어야 했다.


마음속에 있던 말들을 보내고 나니, 더 이상 그에 대한 감정과, 하고 싶었던 말들이 사라져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었다.


그런데 저 카톡 뒤로 그가 미안하다며, 퇴근이 가능할 것 같다고 보자고 연락이 왔다.


진짜. 왜 이럴까. 내가 보낸 카톡을 못 본 걸까? 아님 카톡을 보고 정신이 차려진 걸까.

얼마나 대단한 할 말이 있길래 앞뒤 없이 이러는 걸까. 정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그를 보기로 했다. 그에게 많은 시간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내 동네로 오라고 하려다, 헤어진 상태로 동네에서 보는 게 좀 이상한 모양인 것 같아 적당한 곳에서 보기로 했다.


왠지.. 또 그가 울 것만 같아서 카페에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가 도착했다.


난 무슨 말을 하려고 보자고 했느냐 물었다.  


그는 나에게 먼저, 나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정말 그는 울기 시작했다. 지난번 사무실보다는 좀 많이. 마치 우리가 헤어지던 날처럼. 그는 연신 자신이 입고 온 반팔에 눈물을 닦았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정리된 상태였던 나는 우는 그를 보며 ‘뭐야?! 내가 눈물버튼이냐’라고 생각했다. 내가 고백했던 그날과는 달리 미리 준비된 휴지는 없었다. 내가 가져다주기도 싫었다. 그저 휴지가 필요 없게 어서 눈물을 그치기를 바랐다.


그는 내가 그의 아픈 손가락이라고 했다. 아픈 손가락이라..


예전에 그가 대리였을 때, 그의 팀에 신입 남자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은 사회성이 좀 부족한 편이었고, 업무를 처리하는데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이런 신입직원을 팀장은 매우 답답해했고, 팀장이 그 직원을 구박하는 소리는 파티션을 넘어 온 사무실에 퍼지기 일쑤였다. 결국 그 직원은 1년이 되기도 전에 퇴사를 하게 됐다. 그 뒤로 종종 그는 그 남자신입직원을 자신의 아픈 손가락이라고 표현했다. 있을 때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근데 내가 그의 아픈 손가락이라니.

그를 향해 최선을 다했던 나에게 자신이 못할 짓을 했다고 생각해서인가. 병 주고 약 주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원맨쇼가 따로 없군.


그리고 그는 5개월전 헤어질 때 했던 말들을 그대로 반복했다.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라. 자신은 어렵겠지만 나는 가능할 것이라고.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오래오래 생각이 날 것 같다. 자신에게 너무 많은 걸 해줬던 사람이라.

(그렇겠지. 난 당신에게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니까.)


등등. 덤덤하게 듣기만 했다. 그것도 곧이곧대로 들리진 않았다. 그리고 사실 별로 의미 있는 얘기도 아니었다. 내가 자주 표현하는 말로, 영양가 없는 얘기들.


헤어질 때 했던 얘기를 한 번 더 하기 위해 그는 나를 보자고 한 것인가.


나에 대한 걱정과 감흥없는 당부를 끝으로 그는 이렇게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래.. 그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내가 나왔나 보다. 만나는 동안 나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한 적이 없어 늘 야속했는데, 이렇게 듣게 되는구나. 쉽지 않은 표현일 텐데 해주는 그에게 나도 작게 나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자신도 곧 퇴사를 할 것이라고 했다.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은 정말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난 꼭 그렇게 하라고 했다. 당시 회사에서 그의 상태, 입지로 봐서는 당장 퇴사를 한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그리곤 자연스럽게 그의 버스를 같이 기다리고, 그가 버스에 올라타고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모습을 끝으로 우린 정말 끝이 났다. 5개월 전보다 더 말끔하게 정리된 느낌이 들었다.


그와 함께였던 8개월의 모든 순간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사진들을 보면 나는 세상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봐도 웃음이 지어진다. 참 예뻤다.


연애 끝에 남겨진 것들은 많았다. 그에게 예쁜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나를 가꾸고, 장롱면허였던 나는 그와 외곽을 다니기 위해 운전연수를 받았고, 그를 기다리는 시간들이 아까워 십자수, 그림 그리기 등의 취미생활을 했다.


그리고 연애하는 동안 ‘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나 라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옆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눈이 되는지, 어떤 말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들을 알게 되었고, 후회스러운 행동이나, 말들은 다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조심해야지. 라는 미래지향적인 생각들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후회하진 않는다. 굳이 8개월의 기간을 잊으려고 하지 않겠다. 모든 순간들이 나의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나를 그저 아픈손가락이라고 생각해 미안한 마음이 들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한때 나도 그가 나의 아픈 손가락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자꾸 못해준 것이 생각나지 않을까..


하지만 아픈 손가락이란 상대를 향해 무언가를 더 해주지 못해 마음 깊은 곳에 미안함이 남았을 때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겐 그가 아픈 손가락이 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나의 X일 뿐.

X는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아픈 손가락일 필요까진 없다.


나의 최선은 아름다웠고,

나는 다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것이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필로그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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