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지가 차 놓고 땅은 왜 보고 다녀 웃기지도 않네
(7편에 이어서)
헤어진 당시엔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안했다. 이제 그를 그만 기다려도 되는구나. 카톡도, 전화도.. 그가 나를 우선으로 생각해 줬으면 구걸했던 그 짠했던 마음도. 그냥 그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겠구나. 홀가분하다. 다시 웃어야지.
그러나 난 사내연애 중이었었고, 이별을 했다.
사내연애의 최대 단점. 이별하고도 봐야 한다는 것. 내 눈앞에 알짱거리는 그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회사는 아침마다 사무실 중간에 동그랗게 모여 그날 각자의 이슈, 외근일정 등을 공유하는 조회시간이 있다. 그때마다 그를 말 그대로 ‘마주’ 봐야 한다. 상상만 해도 불편하군..
헤어진 바로 다음날 아침조회 때, 그는 아예 땅을 보고 있었다. 얼씨구. 근데 뭐 저렇게 까지?
업무적으로 그와 접점이 적었던 것이지, 아예 없진 않았기 때문에 업무적으로 소통이 필요한 부분이 있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내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내가 5를 부탁하면 그는 10까지 해줄 것처럼, 그것도 지금 당장 해줄 것처럼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참내, 만날 때나 잘해줄 것이지, 이제 와서 무슨.. 내가 퍽이나 고마워하겠다. 그리고 괘씸했다.
이렇게 그가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게 짜증이 났었다.
가장 친했던 직원에게
아니, 왜 저러고 다닌데? 요즘 땅만 보고 다녀, 그 사람!
크크 그래도 그게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는 것보단 나을걸?
맞네. 그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면 더 짜증 났겠구나.
그냥 다 싫다. 다 짜증 나고.
그즈음, 그에게 보고를 받던 부장이 나를 불러 물었다.
최 선생, 0월 0일 00시에 강당이 사용불가라고 하는데 맞아?
잠시만요, 아뇨 그날이면 사용 가능합니다.
뭐?! 뭐야 0 팀장, 확인 안 했어??!!! 0 팀장, 들어왓!!!
그러고 부장실에서는 엄청난 샤우팅이 들려왔다. 도대체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냐, 그거 하나 확인하는 게 어렵냐, 이래서 내가 다른 일들을 믿고 맡길 수 있겠냐는 등 그를 향한 타박이 문 밖까지 들렸다.
알고 보니 그가 준비하는 큰 행사에서 내가 관리하는 공간인 강당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 강당이 그날 비어있는지, 스케줄을 확인하는 간단한 절차가 필요했었을 것이다. 이건 일이니, 나에게 그냥 묻던지, 팀원을 시켜 확인하던지, 방법은 많았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았다. 업데이트되지 않았던 구 버전의 스케줄표를 보고 잘못된 정보로 보고를 올린 모양이었다. 그러다 삼자대면으로 뽀록이 난 거고.
에휴..답답하다. 그는 뭘 그렇게 어렵게 돌아가는지.
또 그러다, 슬퍼져 울곤 했다.
가장 친한 직원과 술을 마시던 날, 알바생이 나와 같은 상황인건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노래가 ‘이별에디션’이었다. 모든 노래가 내 상황인 것 같았다. 우리나라엔 참 이별 노래가 많다는 것을 그때 새삼 알게되었다. 그래서 난 한동안 팝송만 듣곤 했었다. 의식해서 듣지 않으면 가사 따위 의미 없는 그런 팝송.
난 그가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슬펐다.
이렇게 난 감정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는 듯했다. 쿨하지 못하게 왜 이래.라는 마음속 생각과 반대로. 헤어진 뒤, 그를 향한 감정이 무(無)에서 짜증에서 측은에서 분노에서 슬픔으로 계속 바뀌었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불쑥불쑥 나를 오갔고, 그 감정에 따라 동요하는 내가 싫었다. 난 이런 감정들이 너무 힘들었다.
나답지 않았다. 나 다워지기 위해서는 다시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제 그만 나 자신을 괴롭히고 내 행복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결정했다. 이곳을 떠나기로.
그와 헤어지고 3개월 하고 반이 지났을 때 난 퇴사를 결정했다.
그와 완전히 이별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