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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ying Pie Jun 22. 2023

이른 아침을 달리다

밴쿠버의 겨울 풍경

오늘도 달립니다.

영하 5 ºC 이하로 내려가지 않으면 달리기를 할 때 반바지를 고집합니다. 피부에 닿는 차고 깨끗한 아침 공기의 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코를 통해 들어오는 영상 3 ºC의 맑고 차가운 공기가, 마치 깊은 산속 계곡물처럼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가, 뇌의 주름진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씻어낸 뒤, 하얀 입김과 함께 빠져나가는 이 느낌을 사랑합니다.


달리기를 할 때 종종 정신줄을 놓습니다. 그래도 됩니다, 아니 그래서 더 좋습니다. 물론 전부 다 놓지는 않고 안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감각기능과 뇌신경은 남겨놓습니다. 하지만 그밖에 불필요한(?) 뇌기능은 다 꺼놓고 달립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음, 그건 저도 모릅니다.


달리기는 동작이 단순하고 반복되며, 일정한 리듬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운동입니다. 자연히 들숨과 날숨의 호흡도 그 리듬에 맞추어집니다. 그렇게 호흡을 고르며, 익숙한 동네길을 한참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정신줄이 저절로 놓아집니다. 이제 더 이상 내 생각이 내 생각 같지 않고, 내 다리도 내 것 같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일종의 자율주행이죠. 그러면 슬슬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달리기를 하다가 이 상태가 되면, 마음속 깊은 생각과 오랜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는데, 이는 밤에 자면서 꾸는 꿈과 여러 가지로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때 무슨 생각이 떠오를 것인지는, 꿈이 그렇듯 미리 알 길이 없기에 매번 신기하고 스스로 감상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또한 이 생각들은 그 소재와 형식에 정말 아무런 제한이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꿈에서처럼 갑작스럽게 시공간이나 논리가 뒤죽박죽 뒤틀리거나 하지 않고,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꿈보다 좋습니다.


이런 생각과 기억들은 때론 걷잡을 수 없는 들불처럼 거세게 일어나 잠시 저를 삼켜버리기도 하고, 사방에서 떠올라 동시에 터지는 화려한 폭죽처럼 한껏 들뜨게도 하고, 맑은 수채화처럼 그냥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 짓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 때론 갓 내린 진한 커피 향처럼 온 마음에 스며들기도 합니다.


이 상태로 한참을 달린 것 같은데 막상 정신을 차려보면 불과 몇 분에 지나지 않았던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짧은 시간이 제게는 무척이나 소중합니다. 특히 까맣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면, 마치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어린 시절 잘려나갔던 키스신들을 이어 붙여 만든 알프레도의 마지막 선물을 받은 토토처럼 마음이 말랑말랑해집니다.


달리며 하는 생각의 끝은 언제나 연로하신 어머니와 멀리 사는 누나를 거쳐, 아내와 아이들이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리움인지 향수인지, 후회인지 미안함인지, 간절함인지 감사함인지 모를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주책스럽게 눈물이 나오기도 합니다. 뭐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쯤 되면 이미 온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고, 검안의의 권유로 언제나 진한 선글라스를 쓰고 달리니까요.


(C) Flying 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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