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실패
소비자가 가진 가치, 즉 돈과 내가 만들어 낸 제품을 교환하는, 즉 마케팅을 업으로 삼아 월급을 받는 사람이다.
이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소비자들은 그냥 제품을 사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스토리를 사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냥 ‘좋아요, 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제품이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스토리를 공유하면 같은 제품이라도 몇 배 더 비싸게 팔 수도 있고, 몇 배 더 많이 팔 수 있다. 그런 경우를 숱하게 경험했다.
이렇게 제품에 스토리를 담는 것을 ‘브랜딩’이라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브랜딩은, 제품명에 포함되거나 앞에 붙는 '브랜드'와는 다르다.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좀 더 잘 알리고, 소비자가 기꺼이 우리가 원하는 가격을 주고 사도록 만드는 모든 활동이 브랜딩인 것이다.
이 브랜딩은 나 같은 직장인에게도 적용된다. 직장인의 경우, 제품이 소비자에게 팔리는 것처럼 회사에 팔리거나(취직), 중고로 거래되고(회사 내 각종 발령), 다른 회사에 팔리는 일도 빈번하기 때문에(이직) 그냥 "저 일 잘해요", "열심히 일해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만의 서사를 담은 매력적인 브랜딩이 필요하다. 명함 속 회사 이름과 직급만으로는 좋은 값에 팔리기 어렵다.
언젠가 친한 선배들과 오른팔로 여기는 부하 직원을 포함하여 몇몇 회사 동료들에게 날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대부분 답은 ‘똑똑하다, ‘일을 열심히 한다’ 두 가지였다. 얼핏 듣기에는 좋은 얘기지만 이건 상기한 예처럼 우리 제품 좋아요(=직원이 똑똑해요), 저렴해요(=직원이 일 많이 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칭찬이 아니라 평범함의 확인에 불과했다.
언젠가부터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이 뜸해지고 회사에서도 더 이상 승진 얘기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시선도 비슷한 것 같다. 내가 정말 똑똑한지도 모르겠지만, 자기가 똑똑하다는 브랜딩을 하고 있는 사람이 회사 내에 80%는 되는 것 같고, 근면성실하다는 것은 회사원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브랜딩이니, 모두가 똑같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내가 내세워봤자 잘 팔릴 리가 없다. 게다가 나는 나이도 많으니 더더욱 매력은 떨어진다.
오래 직장 생활하면서 자기 브랜딩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브랜딩을 위해서는 한 분야에서 업력을 오래 쌓는 게 중요하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25년 채우기 쉽지 않은 짧은 직장 생활에서 여러 분야를 건드리면 브랜딩의 기본이 되는 ‘전문성’이 보증이 되지 않는다. 코카콜라가 그 브랜드로 덤프트럭이나 속옷도 만든다면 최고의 음료 브랜드가 될 수 없지 않겠는가.
개인 역시 마찬가지다. 회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특정한 직원에게 직무를 바꿔보라고 권유하고, 때론 강제하곤 하는데, 이게 계속 잘 되면 회사에서 차기 임원 후보, 사장 후계자 소리까지 들으며 대성할 수 있겠지만 보통 이런 건 몇몇 임원들의 지극히 사사로운 판단에 따라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김 부장에게 이거 하나 맡겨보면 잘할 것 같은데?”, “이번에 옮겨가는 부서에 박 차장도 데리고 가보자”) 잘 되는 확률도 낮고 설혹 잘 되더라도 개인 브랜딩은 매우 꼬이게 된다.
내가 바로 그런 케이스인데, 커리어를 꺾고 새로운 길에 들어설 때마다 시장에서의 매력은 곤두박질쳤다. 몇 년간 겨우 쌓아놓은 전문성이, 포지션을 바꿀 때마다 제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 업계에서 ‘푸조’ 정도의 이름값을 가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브랜드로 TV를 팔게 된 셈이랄까. 푸조가 자동차에서는 좋은 브랜드라지만 누가 푸조의 신제품 85인치 TV를 사겠냔 말이다.
물론 마케팅으로 오지 않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늦었다는 것이다. 이쪽 길이 맞다고 생각했다면 적어도 30대 초반에는 넘어와서 10년 이상 경력을 쌓았어야 했다. 커리어 전체를 바라보는 생각과 결정, 과감한 액션 없이 이리저리 옮겨다 보니 지금의 답답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게 첫 번째보다 더 큰 문제였다. 우리의 직장생활은 비슷비슷한 제품들이 편의점 매대에 전시되어 있는 것처럼, 고만고만한 직장인들이 승진, 이직, 고평가의 선택을 기다리며 매일 기계적으로 일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선택을 받으려면, 아니 적어도 눈길이라도 끌려면 어떻게든 시선을 사로잡아야 했다. 소비자가 매대 위에 있는 제품을 한 번 쳐다보게끔은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태생적 성격이 내향적이고 내성적일 뿐 아니라, 이 조직의 원리를 간파하지 못해서 스스로를 잘 내세우지 못했다. 작게는 미팅에서 자기 의견을 먼저 내세우지 않는 것에서 크게는 회사의 굵직한 프로젝트에 자원하지 않는 것까지, 괜스레 나섰다가 내 이름 앞에 잘못된 수식어가 붙지 않을까 염려했다. 젊었을 땐 선배들에게 찍힐까 두려웠고, 나이가 들어서는 말 한마디로 고위 임원에게 밉보일까 봐 걱정하기도 했다.
완전히 틀린,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게 꼭 긍정적인 내용일 필요는 없었다. “브랜드 세 개를 연달아 말아먹은 사람”도 좋고 “100명을 날린 구조조정 전문가”도, “명품 슈트만 고집하는 사람”이나 “시기 질투로 여러 번 좌천된 리더” 같은,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 수식어도 지금 생각하니 괜찮다. 이런 사람의 이력서가 손에 들어오면 나라도 궁금해서라도 먼저 확인할 것이다. 이게 브랜딩이다.
어 저 사람 뭐지? 하는 관심을 끄는 사람이 되었어야 했다. 오명이나 악명도 괜찮았다. 물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듯한 악명까지는 곤란하다. "사내 폭행으로 고소를 당한 사람"이나 "회사 비용을 착복한 사람" 정도까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내 이름 앞에 강하고 튀는 수식어는 전략적으로 마련해야 했다.
동네 슈퍼마켓이나 마트, 편의점의 매대든, 네이버나 쿠팡의 검색 결과 페이지에서든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자 하는,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수십수백의 제품들이 있다. 나도 직장인이 된 이상 그 제품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임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니까”라는 순진한 믿음은 접고,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아야 하는 제품일 뿐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여, 다른 제품들과 포장지에서부터 다름을 보여줬어야 했다.
남들이 다 무채색이면 과감히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남들이 다 정육면체라면 혼자 원뿔이라도 되었어야 했다. 모두가 착한 브랜드를 들고 나올 때, 혼자 독한 이름이라도 내세워야 했다. 설혹 그게 악명이라도 말이다.
이것이 내가 실패한 열두 번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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