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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배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1부 - 진로에서의 실패

by 박기주

우리가 탄 배는 분명 가라앉고 있었다.


나도, 동료들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걱정하면서, 이제 곧 좋아지겠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했다.
노를 젓고, 돛대를 손질하고, 갑판을 청소하고, 조타를 바로잡으며.


그러나 그때는 최선을 다해 일할 때가 아니었다.
배에서 뛰어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Licensed image from Vecteezy




모든 산업에는 태동기에서 시작하여 성장기, 성숙기를 거쳐 쇠퇴기에 이르는 이른바 '라이프사이클'이 있다. 개별 기업도 마찬가지다. 어느 기업이든 미약한 시작이 있고, 주주와 직원, 고객까지 모두가 행복한 성장기와 넉넉한 수확을 만끽하는 전성기가 있으며 화려했던 날을 뒤로한 채 쓸쓸히 사그라드는 쇠퇴기가 있기 마련이다.

Licensed image from Vecteezy


물론 모든 산업과 기업이 이 주기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도 아니다. 한 번 내리막길을 탔다고 한들 다시 올라오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SK 하이닉스는 2024년 한 해, 66.2조의 매출과 22.5조의 영업이익이라는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냈지만 2009년만 하더라도 전기요금도 제대로 납부하지 못할 정도의 적자기업이었고,

애플도 스티브 잡스가 쫓겨난 후 연 이은 실패로 1997년 10억 달러 이상의 적자와 함께 파산위기까지 맞았지만, 화려하게 부활하여 2024년 4분기에는 분기 매출 최고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렇듯 끝날 것 같은 기업도 어마어마한 반전을 만들 수 있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회사도 10년 뒤, 20년 뒤에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직장 생활은 그다지 길지 않다는 것이다.

2024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 중 정년퇴직까지 이르는 비율은 12.6%밖에 되지 않고 평균 51.1세에 주된 직장에서 퇴직한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20년에서 25년 정도 일하다가 회사를 떠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많아봤자 25년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산업 혹은 기업의 ‘성장기에서 전성기에 이르는 황금기’와 일치시켜야 한다. 커리어의 대부분을, 가능하다면 커리어의 전부를, 황금기를 겪고 있는 회사, 적어도 쇠퇴가 시작하지 않은 회사에 담아두어야 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황금기에 접어든 회사에서 몸담으면 아래와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 회사가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후한 연봉인상률과 보너스를 지급한다

- 회사가 성장하니 계속 새로운 자리가 나고, 따라서 승진의 가능성도 높다

- 회사가 직원들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기 때문에 일하는 환경과 복리후생도 좋다

- 회사가 자신감 있게 다양한 시도를 하기에 직원들도 그만큼 많이 배운다

-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 분위기가 좋다


반대로 당장 내일 망할 수도 있는 태동기의 스타트업에 커리어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는 것은 위험하다. 젊은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지만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이미 정점을 지난 회사에 오래 머무는 것도 반드시 피해야 한다. 회사가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하면 위에서 언급한 ‘황금기’의 장점과 정확히 상반되는 단점들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꽃이 피기 시작한 회사에 신입으로 들어가, 회사와 함께 성장하여 젊은 나이에 임원이 되고, 충분한 돈을 벌고 명예를 누린 후 회사가 활력을 잃기 전에 퇴직하는 것이다.

이직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타입이라면 더 나은 안도 있다. 황금기를 누리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어느 정도 정체가 왔다 싶으면 황금기에 막 접어든 다른 회사로 이직하고 이를 거듭, 이른바 ‘잘 나가는 회사’만 골라 다니며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이다. 실제로 내 주위에는 이 작업을 통해 40대 초반의 나이에 유명 기업의 CEO가 되고, 글로벌 기업의 아시아 담당 임원이 되는 등 화려한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등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든 사람이 적지 않다.


나는 이 중요한 계산을, 하지 못했다.


불행히도 지금 다니는 회사는, 내가 이직해 온 지 몇 년 안 되었을 때 정점을 찍고 가파른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산업이나 회사명을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 회사가 자랑하던 기술은 이제 시장에서 한 물 간 기술로 여겨지고 있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며 비즈니스 모델의 전환을 꾀하고는 있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몇 년째 매출과 순이익이 줄고 있는 상황이다.


회사의 저력과 직원들의 역량이 있기에 언젠가 반등을 만들어 내긴 할 것이나, 일부 사업을 정리하고 구조조정을 완료하려면 앞으로 최소한 5년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 할 것이다. 그 터널 안에서 내가 마주할 것은 한정된 성장의 기회, 낮은 보너스, 원가 및 비용 절감의 압박, 침체된 회사 분위기, 그리고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Image by TaylorSmith from Pixabay


내가 좀 더 영악하고 냉정했다면,

새 기술이 시장에 등장했을 때 지금의 회사를 떠났어야 했다.

매출이 처음으로 성장을 멈춘 시기에 과감하게 결단했어야 했다.


나를 받아준 회사를 향한 고마움,

회사가 살아나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책임감,

그런 '착한 마음'에 갇혀 커리어의 방향을 면밀히 계산하지 못하고,

그저 회사를 위해 열심히만 일했다.


하지만, 갑판의 선원 하나가 돛대를 잘 손질한다고 해서, 가라앉는 배가 다시 뜨는 건 아니다.

고작 1등 항해사 정도의 리더인 내가 아무리 야근을 하고 주말 출근을 해도,

이미 물이 가득 찬 배를 건져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위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뛰어내리라고 조언하지만 이미 늦었다.

황금기의 회사들은 나이 많은 나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쇠퇴기에 들어선 우리 회사 출신은 시장에서의 값도 떨어져 있고, 넘어갈 다른 배 없이 무작정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다.

그저 이 배의 완전한 침몰이 더디 오길 바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의 회사를 사랑한다.

좋은 동료들, 존경하는 선배들, 믿을 수 있는 후배들과 함께 일하는 건 행운이다.

하지만 끽해야 25년 남짓인 내 커리어의 10년 이상을

가라앉는 배에 태웠다는 것은 너무도 뼈아픈 실수였다.


내 커리어는,

회사의 성장 곡선에 정밀하게 맞춰졌어야 했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과감히 뛰어내려야 했다.


이거이 내가 실패한 세 번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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