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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이즈 페인, 오 쇼콜라!

by 해리슨 리 Mar 17. 2025

사실 나는 지난주부터 동네에 새로 들어설 빵집이 어서 인테리어 공사를 마무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오픈 전부터 이미 내 마음을 훔쳐간 네모난 스티커들이 가로세로 질서 정연하게 빵집 유리문에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총 12개였다, 연속으로 획득한 블루 리본의 숫자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렇게 훌륭한 빵집을 동네에서 영접하게 된다니, 마음 한 켠이 웅장해졌다.


대망의 오픈 날.


재빨리 들어가 보았다. 아담한 매장 크기와 비례한지 빵 종류는 많지 않았다. 눈으로 스윽, 스캔하니 진열대 맨 위에 크루아상이 있었고 그 옆에 팽 오 쇼콜라가 보였다.


나는 빵 중에서 팽 오 쇼콜라를 가장 좋아한다.


불어로 ‘초콜릿을 품은 빵’. 굳이 맛에서 이유를 찾으라 한다면 고소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 답하겠지만, 진짜 이유를 고백하자면 나의 신입사원 시절로 거슬러 가야 한다.


내가 20대 중후반의 나이였다. 은퇴를 목전에 둔 노년의 부장님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유독 빵을 좋아했던 나는 프랑스 여행 책자에 소개된 80년 전통의 빵집 주소와 함께 파리로 출국했다. 어찌나 마음이 들떴었던지, 비행기 창문 밖 구름이 밀가루 반죽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구름을 바라보면서 입안 가득히 부풀어 오르는 크루아상을 상상했다. “데헷.”


그런데 웬걸. 도착한 파리엔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거래처와의 의견 차이가 팽팽했고 조금도 좁혀지질 않았다. 급기야 회의록엔 출장을 연장해야 할 징조들만 득실했다. 온종일 말싸움만 늘어진 바람에 관광은 고사하고 끼니도 회의실에서 대충 샌드위치로 해결해야만 했다.


계약서를 검토하다 고개를 들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이 생긴 십자군 기사단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무서운 살기에 기죽은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주야장천 서류만 검토하는 척했다. “하이고, 그럴 리가요.” 회의실 구석에서 조용히 본사로 전화 보고하는 부장님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는 걸 들으며 상황이 매우 심각하구나, 직감했다.


숨 막히는 출장 속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갓 구운 빵의 향기였다.


매일 아침이면 종류별로 담긴 빵 바구니가 회의실 탁자 위에 올라와 있었다. 다행히 먹는 것 가지고는 기사단원들도 트집 잡지 않았기에 나는 꽃향기보다 좋은 버터 향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내가 빵빵, 거리는 게 거슬리셨던 것일까. 부장님은 ‘페이스트리’라 하셨다. 바구니에 담긴 빵들의 유식한 표현이 말이다. 돌아보면 늘 후배들에게 세련되게 살라 조언하셨던 분이었다.


부장님은 바구니에 담긴 빵 중에서 유독 한 가지만 드셨는데, 그게 바로 팽 오 쇼콜라였다. 내가 호기심에 여쭤보았다. “부장님은 다른 건 안 드세요?” 그러자 대답 대신 메모지 한 장을 집어 볼펜으로 무언가 끄적거리셨다. 내게 무심하게 건네주신 종이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Life is pain, au chocolat!


이게 영어인지 불어인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에게 부장님이 쉬크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인생은 말이야. 하루하루가 힘들어. 아주 고통의 연속이지. 하지만 그런 와중에 초콜릿 같은 달콤함을 맛보면 슬픔은 잠시 멈추는 거야. 그 짧은 순간들을 가리켜 행복이라 부르는 거고.”


이게 바로 팽 오 쇼콜라의 숨겨진 의미라 하셨다.


그 순간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도 같다’, 는 명대사를 떠올린 나는 사부님으로부터 무공의 비서를 전수 받은 무협지 주인공처럼 부장님이 건네주신 메모지를 수첩 사이에 고이 끼워 넣었다. 그리고 팽 오 쇼콜라를 입으로 가져가 오물오물 맛보았다. 처음엔 눅눅한 밀가루 맛이 거슬렸지만 뒤늦게 찾아오는 달콤함이 나쁘지 않았다. “음, 바삭할 때 먹으면 맛있겠네!” 그렇게 평가했다.


출장 마지막 날.


우리가 조건을 일부 양보하자 계약은 극적으로 합의점을 찾아갔다. 엉킬 대로 엉킨 실타래가 저절로 풀어지는 마법의 순간이었다!


차가운 송곳 같던 거래처 사장님의 눈빛은 따스한 봄날의 햇빛을 머금은 에메랄드 호수처럼 인자해졌고, 촉박하게 다가온 우리의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직접 공항으로 운전해 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가까스로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출장 동안 그 유명하다는 빵 집은커녕 에펠 탑 근처에도 못 가봤지만 나는 상심할 겨를조차 없었다. 이미 내 손가락들은 노트북 위에서 보고서 글자들을 바쁘게 타이핑하고 있었고 기내 밖으로 보이는 파리의 야경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기에.


옆 좌석에서 부장님의 코 고는 소리가 드르렁, 울릴 때였다.


정신없이 보고서를 쓰던 나는 잠시 비행기 차창 너머로 시선을 비꼈다. 컴컴한 하늘 위엔 서울에서 올 때 보았던 크루아상 구름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지만 <윌리 웡카>의 초콜릿 강을 항해하듯 희끄무레 펼쳐진 구름 바다가 대신 나를 반겼다. 왠지 플라스틱 컵을 창밖으로 뻗으면 뜨끈한 초콜릿 수프가 듬뿍 퍼질 것만 같았다. 나는 오븐에서 갓 구워낸 팽 오 쇼콜라를 주욱, 찢어 먹는 상상과 함께 피곤했던 눈을 감았다.


다시 동네의 블루리본 빵집으로 돌아와서,


“그럼 어디. 12년 연속으로 블루 리본을 획득한 거장의 팽 오 쇼콜라를 시식해 볼까나?”


나는 크게 입을 벌려 앙, 하고 베어먹었다. “와우.” 바삭하게 부서지는 식감이 나의 오감을 깨워주었고, 씹을수록 달콤 고소해지는 맛이 내 입꼬리에 미소를 그어주었다.


뭐랄까, 진심이 베이킹된 맛이었다.


“그래, 블루리본답다. 인정.”


입 주변에 묻은 빵 부스러기들을 털어내던 찰나였다. 냅킨 중앙에 프린트된 문구가 보였다.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그 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과거의 그 메모지를 떠올렸다. “과연 나는 언제쯤 내 초콜릿을 만날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오른손에 매달린 종이봉투 속에서 빵들이 서로 부딪는 질감이 들려왔다.


그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혹시 나 찾았어?” 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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