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량품들의 사계 Mar 20. 2024

불량품들의 사계

꼬라지가 안 오게 생겼네 80

꼬라지가 안 오게 생겼네




얼마 전 고향 연규 오빠가 생수와 계란 한 판을 들고 집에 왔었다. 마당 입구에서 나를 보자마자 “세수했냐?” 마침 놀러  있던 성혜, 써니, 애경이가 그 말을 듣고 배꼽을 쥐고 뒤로 넘어갔다. 당연히 세수했는데... 억울했다.    


겨울에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옷을 몇 겹씩 껴입는다. 속옷, 내의, 티, 스웨터, 패딩 잠바, 오버까지 입는다. 그래서 옷을 입고 벗는 시간이 꽤 걸린다. 목욕탕 갈 때마다 목욕하고 나오는 사람이 부럽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 친구네 놀러 갔었다. 혼자 서울서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공중목욕탕에 가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매들끼리도 홀딱 벗은 몸을 본 적 없었고, 심지어 런닝구만 입은 오빠들 모습도 본 적 없었다. 이렇게 자란 내가 사람들 앞에서 벗은 모습이 어찌나 부끄러운지 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냅다 경보로 달렸다. 탕 안으로 간다는 게 출입구였다. 그것도 깨 활딱 벗고. 그래도  목욕탕에서 씻으면 얼마나 좋은지 그때 알았다. 그날 이후로 목욕탕만 보이면  탕 속으로 꼬르륵 들어갔다.

송파 방이동에 살 때는 하루도 안 빠지고 수정사우나에 갔다. 사우나에는 아줌마들이 항상 바글거렸다. 매일 다니다 보니 서로 눈인사를 할 정도였다. 나는 반신욕만 딱 30분 하고 나왔다. 그때부터 반신욕 좋은 점을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목욕탕 주인이 나를 반신욕 홍보대사라고 불렀다.

이곳 고골은 목욕탕이 멀다. 먼 것도 먼 거지만, 목욕탕 비가 8천 원이다. 점점 반신욕 횟수가 줄어들었다. 나보다 더 큰 다라이를 사서 집에서 씻었다. 근데 뭐라 할까. 씻어도 상쾌하지도 개운하지도 않았다. 집구석이 추우니 땀도 안 났다. 엘피지 가스를 쓰기 때문에 반신욕 할 정도 물을 데우려면 가스가 장난 아니었다. 반신욕 한 물은 세탁기에 쏟았다. 반신욕도 이 집에서는 포기했다. 나는 집에서 샤워만 하고 한 번씩 목욕탕 가서 때 빼고 광내고 왔다. 겨울에는 나가기 싫어 자의 반 타의 반 점점 ‘추접스러운 뇨자’가 되어갔다.  

   

동장군이 올 때는 시내에 사는 차혜 집과 점심이네 집으로 씻으러 다녔다. 어렸을 때 엄마가 말했다. 남의 집에서 씻으면 씻고 난 후 욕실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라고. 그 말이 떠올라 욕실에 물이 사방으로 튈까 봐 남의 집에서 씻는 게 편치 않다. 그래서 고양이 세수를 하든지 그냥 온다. 목욕탕에서 씻고 오면 가뭄 때 소나기 맞은 돌처럼 반들반들하고 청량감이 느껴지는데.

    

한 번은 보름 며칠 전이었다. 인천 언니네 근처 연안부두 해수탕을 갔다.  ‘아! 살 것 같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데 탄성이 저절로 터졌다. 따뜻한 물에 마음껏 몸을 담그는 일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아따, 물아 오랜만이다!’ 그동안 남의 집에서 씻는 듯 마는 듯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씻고 나서 거울 속 내 얼굴이 얼마나 깔끔하고 예쁜지. 거기다 참해 보이기까지 한다. 술 마시고 난 다음 날 부대낀 얼굴처럼 뽀했다. 가까이 있어 다정한 줄 몰랐던 사랑처럼, ‘자주 못 가 다정한’ 목록에 목욕탕을 첨가하기로 했다.

나는 여태 몇십 년 동안 화장을 안 한다. 그렇지만 화장을 하나 안 하나 목욕탕 거울 속 나는 이리 청순해 보이고 이쁜데... 왜 사람들은 방금 목욕탕에서 씻고 나온 나를 보고도 “안 씻었냐?”라고 할까.      

나는 옷을 사도 낡은 듯한 옷을 산다. 누가 입다가 찢어진 준 옷도 맘에 들면 가져와 입는다. 새 운동화도 흙을 묻히거나 땅에 비벼 신는다. 미장원에 가면 머리도 대충 자른다. 언젠부턴가 머리도 내가 자른다.  파마도 집에 와서 손질한다. 바람에 날리는 듯 자연스럽게 하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 이렇게 다니면 처음 본 사람들도 나에게 “뭐 하는 사람이냐”라고 묻는다. 그러고는 “ 멋있어요!” 한다. 내 자랑 같아 더는 말 안 하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청바지도 낡아 떨어지도록 입었다. 지금도 너무 오래 입어 누더기처럼 돼 버린 청바지가 몇 개나 있다. 청바지만 꿰매 입은 게 아니다. 맘에 드는 옷은 낡아 찢어져도 꿰매 입는다. 이래서 사람들은 나를 씻지 않은 사람처럼 볼 수도 있다.

풍경이 좋으면 털썩 앉고, 걷다 지치면 눕고, 차에 돗자리가 있어 어디서나 돗자리를 편다. 이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노숙자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느그들아, 잘 들어라, 어느 봄날 불교문학에 참석했을 때여. 스님 한 분이 내 옆을 지나가시다, 한 말씀 하셨단께 “자유인이십니다.”

말 나온 김에 또 해야겠다. 근래 수서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나를 보고 외국 남자가 다가와“멋있어요!” 외치면서 엄지를 세웠다. ‘햐아 내가 이런 사람인디, 사람들은 어째서 나보고 안 씻었다고 할까’

꼭 이런 일만 있으면 내가 정말 멋스럽구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생각할 것 같다만 이런 일도 있다.

      

강아지 산이를 안고 올림픽 공원에 가던 중이었다. 공원 맞은편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주차요원이 나에게 비키라고 해서 비켜주었다. 신호가 바뀌자 얼른 횡단보도를 건널 때였다. 주차요원이 내 뒤에 대고 “씨발!”욕을 했다. 나는 돌아서서 “왜 욕을 하세요?” 따졌다. 서로 제 말만 했다. 결국은 내가 레스토랑 사장님을 불러냈다.

“이런 사람이 주차하고 있으면 손님이 오겄어요? 아저씨, 제 돈 주고 이 집에서 스타 한 번 사 먹은 적 있어요?”

“내가 사 먹든 말든 당신이 뭔 상관이야.”

“ ..... 아저씨, 손님이 아저씨 월급 주는 거예요”

나는 말없이 서 있는 여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이 사람이 이런 행동하먼 손님 다 끊깁니다. 나도 여기 간혹 왔었는디 다시는 안 올라요.”

그러자 주차요원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말했다

“꼴이 안 오게 생겼네.”

나는 그 말에 열받은 게 아니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꾹 참았다. 내 옷차림이 아무리 안 오게 생겼다지만, 그 상황에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내가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진짜 웃겼다.

나는 그날 산이랑 주말농장에서 일하다가 나왔다. 밀짚모자 쓰고 장화에 추리닝에 흙 묻은 채로 사투리까지 쓰지, 누가 봐도 이태리 레스토랑 갈 차림은 아니었다. 딱 그지였다.

그날 저녁 친구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친구는 “어머머 너였어? 주인이 너 성격 좋다고 자기 같으면 가만 안 있었다고! ”

친구는 마침 그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배우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다음날 머리에 컬러 왁스 바르고 바바리코트를 빼입고 이태리 레스토랑에 갔다.

친구가 나를 사장님께 소개했다. 주인은 나를 못 알아봤다.

“어제 그 사람 이 친구 아니에요”

“맞아요. 사장님, 접니다.”

어머나, 목소리 들으니 맞네!, 맞아!”

이런 일도 있었다.     


연탄창고에서 놀다 온 까불이가 평상에 앉아 발로 세수를 하고 있다. 여전히 시커먼 까불이나, 나나 “태생이 안 씻은 듯 보이는 걸 어쩌겄냐.”                                                            

작가의 이전글 불량품들의 사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