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기에서 반응이 잘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다. 촉매, 온도, 압력 등. 이 중 하나라도 맞지 않는다면 반응이 잘 일어나지 않거나 우리가 원하는 반응이 아닌 다른 반응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때 반응기에 들어가는 유체의 온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는 친구가 바로 Heater(가열기)다.
Heater dry out 이란?
가열기는 유체의 온도를 운전조건에 맞게 낮게는 수십 도에서 수백 도까지 올려준다. 이때 이 높은 온도를 견디기 위해 가열기 안에 Refractory(내화벽돌)을 설치하게 되는데 이 내화벽돌에 있는 수분이나 화학물질을 날려 보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 작업은 첫 출장 때 이야기 했던 작업과 같은 작업이다. 기계만 바뀌었을 뿐.
이 작업을 위해 기계를 납품한 회사에 전문가 파견을 요청했다. 중요한 기기들은 우리 자체로 테스트하지 않고 전문가와 함께 진행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총 두 명이 왔다. 한 명은 기계 전문가, 다른 한 명은 계장 전문가. 기계 전문가는 기계의 내부와 외부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실제 가열기를 작동시키는 역할을 했다. 계장 전문가는 로직대로 기계가 잘 작동되는지를 확인했다. 특히 가열기는 연료가 들어가기 때문에 누출이나 폭발의 위험이 있어 로직은 너무나도 중요했다. 그래서 전문가의 참여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이렇게 전문가들의 확인 끝나갈 때쯤 우리의 마지막 작업도 끝이 났다. 그 작업은 버너에 공급되는 가스연료라인에 산소를 제거하는 작업이었다. Hydrocarbon(탄화수소)를 받기 위해서는 폭발방지를 위해 배관 안에 있는 산소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 이 작업을 Inerting(산소제거)라 부르는데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호스를 배관에 연결해 질소를 넣어 산소를 밀어내면 끝. 질소가 나오는 배관 끝에 측정기로 산소 농도가 0이 되면 모든 작업은 끝난다.
Inerting 작업이 끝나고 천천히 가스연료배관의 밸브를 열어 가열기 바로 앞까지 가스연료를 채워놓았다. 테스트가 시작되면 바로 불을 붙이기 위해.
드디어 불을 붙이다?
이로써 모든 준비작업이 끝났고 드디어 불을 붙이는 시간이 찾아왔다. 어찌나 긴장이 되던지.
'한 번에 잘 붙겠지?'
'폭발하는 건 아니겠지?'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정말 약간은 무서웠다. 부엌에 있는 가스레인지에만 불을 붙여봤지 이런 대형 버너에 불을 붙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공기와 연료의 비율을 맞추고 버너에 불을 붙이는 버튼을 누르는 순간,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불이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꺼져버렸다. '무슨 일이지? 왜 이러는 거지? 뭐가 문제지?' 무수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불이 붙지 않는 이유가 뭘까?
업체 전문가도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우리들을 보았고 이것저것 점검하기 시작했다. 기계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로직 상으로도 문제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사항은 공기와 연료의 비율이 맞는지였다. 업체에서 계산한 비율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조금씩 비율을 바꿔가며 테스트를 해보았지만 불이 붙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지쳐갈 무렵, 해는 이미 일을 마치고 퇴근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한번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기에 업체 전문가와 작업자들에게 일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밤늦게 까지 작업을 진행했다.
우리의 노력을 가상히 여기셨는지 수십 번의 테스트 끝에 드디어 버너에 불이 붙었다. 그것도 아주 컴컴한 새벽에. 조금씩 바꿔가던 공기와 연료의 비율 중 최적의 조건을 찾은 것이다. 다같이 환호의 함성을 질렀고, 수고했다며 서로를 다독여 주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정말 힘든 시험에 통과한 것처럼, 원하던 회사의 최종합격 통지를 받은 것처럼, 더하 나위 없이 행복했다.
"집에 갑시다"
이 한마디에 모든 피로가 싹 날아가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문뜩 든 생각이 '본인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시간을 위해 지금까지 기다린 것일까'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능력의 빛이 바래는 순간이 있는 법. 하지만 그것이 언제 나타나는가에 따라 인정받을 수도 있고 조용히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불이 밤에 가장 빛나는 것처럼 내가 이 플랜트 현장에 있기에 가장 빛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