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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먼저 은퇴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적절히 하는 삶

by 코지

직장인들은 대부분 꿈을 미루며 산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퇴사하면 "한 달 정도 유럽여행을 가고 싶다", 퇴사하면 제과제빵 자격등을 따야지, 퇴사하면 글을 써볼 거야.


그런데 13년 넘게 회사를 다녀보니 그런 '때'라는 건 오지 않는다. 오히려 더 멀어지기만 할 뿐.


회사를 다닐 때에는 이직할 때 길게 여행 갈 수 있겠지? 하며 이직할 시기만 바라보고 있는데, 이직할 때에는 꼭 그 회사에서 바로 출근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내가 출근이 시급한 회사를 고른 것 일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출근을 하다 여름휴가는 일주일이라도 가야지! 하면 회사에서 눈치를 준다. 심지어 휴가를 다녀오면 권고사직을 하는 곳도 있었다.


모든 꿈을 퇴사 후로 미뤄놨는데, 막상 퇴사를 해도 불안해서 움직일 수가 없다. 회사를 다닐 때에는 눈치도 보이고 '시간이 없어서' 퇴사를 하고는 '돈이 없고 불안해서' 결국 또 주저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저하다 원하는 은퇴를 했을 때 내 나이는 60이 넘어 있겠지? 그때 하고 싶은 일들이 지금과도 같을까? 그리고 그 일들을 그때에 할 수 있을까?


프리랜서로 생활을 하고 있는 요즘, 나에겐 회사를 다닐 때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많다. 매번 바쁘게만 살아오다가 여유로운 삶이 시작되니 꽤 많이 어색하다. 주변 사람들은 시간 많아서 좋겠다고 하지만 마냥 좋지는 않다. 황당한 느낌도 들정도다. 앞만 보며 바쁘게 달리다가 구름 지나가는 하늘, 시시각각 계절에 맞는 옷을 입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니 얼마나 어색할까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우리 동네가 이렇게 예뻤었나?' '설경의 모습을 바라본 게 몇 년 만일까?' 라며 여유를 즐기려다가도 바쁨 중독자 버릇이 튀어나와 '한창 젊은 나이에 이렇게 여유로워도 되나?라는 생각이 일상을 즐기지도 못한다. 약간의 죄책감마저도 든다.


은퇴 후의 삶이 이런 건가?라고 느낀 적이 있다. 종종 드라마에서 아버지들이 은퇴 후에 고요한 공원을 거닐며 앞으로 나는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하나 신문을 보며 고뇌하는 장면처럼. 다들 바쁜 평일에 나 혼자 반려견과 산책을 하고 집에 돌아와 일을 하는데 나만 한가한 것 같아 세상과 동떨어진 것 같고, 친구들을 만나려 해도 모두 주말에 시간이 나니 주중의 시간은 혼자 세상과 고립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프리랜서의 삶이 마냥 여유로운 건 아니다. 바쁠 때는 직장인보다 몇 배는 더 바쁘다.

일이 한창 바쁜 시기에는 주말, 공휴일 상관없이 새벽에 일이 끝나고 새벽에 출근을 하기도 하고,

머리 쓰는 일과 몸 쓰는 일을 함께 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가기도 한다. 어찌 보면 병원은 직장 다닐 때보다 더 자주 가는 것 같다.


평일에 커피숍을 가더라도 노트북을 꼭 챙겨나가야 한다. 언제 수정 연락이 올지 모르니까. 직장인일 때에는 퇴근 후 주말에 연락 오는 게 미치도록 싫었는데, 프리랜서는 자다가도 전화를 받게 된다. 불안감과 일을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직장인보다 훨씬 더 심하다. 일이 일상에 녹아져야 하는 게 프리랜서인 거 같다.


직장에 있을 땐 회사를 그만두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길게 여행도 떠나고 디지털 노매드처럼 멋있게 원하는 곳에서 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프리랜서가 되어보니 나의 경우 떠나기가 더욱 쉽지 않다. 여유 자금도 더 없다. 그러다 문득 '이러다간 또 후회하겠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하고 싶은 것을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나 자신이 작게 먼저 은퇴하는 중이라고 정의했다. 그랬더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힘겹게 1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성실히 일해온 나 자신을 위해 잠시 작게 은퇴를 선언하고 2주간의 여행을 떠나려 한다. 물론 노트북은 챙겨가지만.. 현실에 미련을 버리고 떠나는 연습을 해야 될 때인 것 같다.

그리고 미래의 일을 먼저 걱정하지 않는 대담함이 또한 필요하다. 먼저 작게 은퇴하는 삶을 누려보고 또다시 힘을 얻어서 일하면 되는 거니까.


실패도 작게 여러 번 하라는 말이 있듯이, 은퇴도 작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하고 싶은 일들을 너무 멀리 미루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날이 하루빨리 찾아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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