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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퇴사

갈아 넣은 자의 최후

by 코지

나의 마지막 퇴사는 비자발적이었다. 바로 '권고사직'을 통보받은 것이다. 스타트업에서 3년 넘게 나를 갈아 넣은 결과가 이거라니. 그동안의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 하나씩 건물을 올리는 것과 같았던 회사생활. 제공할 서비스, 제품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3년 동안 플랫폼을 만들고 매출을 만들어냈다. 내가 하고 싶은 마케팅 업무를 하기 위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기 싫은 일들도 마다 많고 야근에 야근을 더해가며 지내왔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다 권고사직을 하기 3개월 전쯤 윗선에서는 내게 엠디, 마케팅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총괄하라고 했다. 거절 끝에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원하는 데로 일을 했다. 그러다 점점 나를 잃어가는 느낌이었다. 재미없는 숫자를 보고 하다가 하루가 끝나는 머리 아픈 삶은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힘든 업무를 참은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회사를 위해서는 물불 안 가리고 일을 해야 되는 게 맞을 수도 있지만 사람에게는 적성이라는 것이 있다. 모든 일을 다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더욱이 내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그렇게 결국 '권고사직'을 통보받은 것이다.


마지막에는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귀에서 이명 증상도 나타나고, 출근하기가 너무 싫은 심리가 투영된 건지 이유도 없이 몸이 아프고 자주 체했다. 이렇게 괴롭게 회사를 다녀야 하나 싶다가도 다른 대안이 없으니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자. 라며 나 자신을 쥐어짜고 일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회사에서 나가 달라는 것이다. 그 당시 초창기 멤버들은 대부분 자발적 퇴사를 한 상황이었다. 내가 버티고 있자 회사에서 내보내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지금까지 회사를 키운 것에 많은 공을 들인 나에게 이럴 수 있나 억울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마음이 너무 편해졌다. "그래, 내가 끝을 짓지 않으니 알아서 끝을 지어주는구나."라며 운명에 순응하기로 했다.


하긴 버티고 버텨서 하는 일이 잘될 리가 없다. 이미 에너지가 없는 상태에서 뛰는 사람이 얼마나 멀리 뛸 수 있을까? 회사에서도 나보다는 더 멀리 뛸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퇴사 후 가장 후회되는 점은 나를 너무 갈아 넣었다는 거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20% 정도의 여지는 남겨놨어야 됐는데 그조차 통째로 갈아 넣으니 매일이 괴로운 것이었다.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지만 내 건강을 망치며 일했던 나 자신은 상당히 후회스럽다. 돈은 다시 벌면 되지만 건강은 되돌리기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직장생활 오래 하려면 80%만 잘하세요. 물론 이 글을 대표님들이 보면 싫어하시겠지만.


퇴사를 하고 나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앞만 보며 달리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

약 13년의 직장생활 후 후회된 점을 5가지로 추려보았다.


1. 여유 자금을 모으지 못한 것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게 돼서 저축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권고사직이 되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물론 회사에서 실업급여와 퇴직금등을 줬지만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에는 턱도 없었다. 작은 비상금이라도 만들어 뒀어야 하는데 들어갈 돈이 많다는 핑계로 돈을 모으지 못했다. 대부분의 직장인 분들은 차곡차곡 저축을 잘하고 있겠지만 반드시 미래를 위해 목돈을 대비해 두어야 한다. 아니면 절약하는 습관이라도 배어있어야 하고.


2. 다른 일을 하지 않은 것

한 동생이 이야기를 했다. 경력은 시간이 지나면 쌓이는 거지만 실력은 자신이 쌓아야 되는 것 같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밖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많은 직장인들이 부업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블로그던 유튜브던 다른 투자 수익이던 미리 해놔야 한다. 나처럼 한길만 파면 후회할 가능성이 높다. 회사를 다니며 틈틈이 다른 일들을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 어떤 작은 일이라도.


3. 감정 소비를 많이 한 것 , 그 감정이 지출로 연결된 것

이 부분은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직장에서 상사와 마찰이 있거나 힘이 들면 동료들과 술 한잔 기울이며 한탄을 하게 된다. 그리고 뭔지 모를 헛헛한 마음에 물건을 사들이고. 소비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지만 지나고 보면 가장 비생산적인 시간들이다. 말하면서 또 안 좋은 감정이 올라오고, 기분도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과 돈을 낭비했다는 생각만 쌓일 뿐. 횟수를 줄이고 그 시간에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해야 한다. 취미 생활로 스트레스를 풀거나 차라리 운동을 하는 방향이 더욱 생산적일 수 있다. 혹은 부업을 준비하거나.


4. 너무 많은 시간을 고민으로 보낸 것

나는 걱정이 많은 편인데 회사 다니면서도 늘 고민을 했다. 과연 이 길이 맞을까. 아직도 이 고민은 계속되지만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이제 맞는지 아닌지 먼저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해봐야 알 수 있으니까.

고민은 짧고 굵게, 행동은 빠르고 오래.


5. 사람을 보지 못한 것

사실 퇴사를 하고 나면 일보단 사람이 남는 것 같다. 나는 일할 때에는 일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더 많이 동료들 얘기도 들어주고 무슨 일은 없는지 안부도 물어봐 줄 걸 그랬다. 일 잘하는 사람보다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게 목표였는데,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결국 남는 건 사람뿐이다.


결론적으로 갈아 넣은 자의 최후는

몇몇 업무로 인한 경험과 성취감, 이렇게 일하면 안 되겠다는 교훈 외에 잃은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금전뿐만 아니라 나의 시간, 나의 건강, 자기 효능감 등을 잃었달까.


지금은 잃은 것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훗날에는 또 바뀔지도 모른다.

이때의 경험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길 바랄 뿐이다.

지금 직장을 다니시는 분들은 나와 같은 후회가 덜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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