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권두언은 쓰지 않지만

가끔 다이어리 정도는 필요합니다.

by 김욱곤
(이미지출처:jini's 소소한 작업실) 이렇게 다이어리가 필요합니다.

예전 병원에서 근무하던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서는 4분기마다 한번 원보(院報)를 발행합니다. 원보의 내용이라야 예상하신 대로 주로 의학이나 그에 관련된 정보 등이고 그동안의 소식들이나 공지 사항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실 수필이나 시 등의 문학적인 감성도 더해지면 좋겠지만 기껏해야 하나둘 넣어주는 정도밖에 기대할 수 없다 보니 원보를 발행해도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고 격려해 주는 평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오다가다 한 부정도 방으로 가져오지만 읽어보려 가져오는 건 아니고 혹시라도 건질 만한 내용은 있는가, 이번 호에는 집필진이 누구인가, 궁금증 해소의 목적이 더 컸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편집장이신 진료부장님이 직접 방으로 찾아왔습니다. 당장 다음 달에 원보가 나와야 하는데 당연직이던 자기가 도저히 편집장 업무까지 수행할 수 없을 듯하니 그 자리를 대신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이런 기습 공격이 어디 있느냐며 고사했지만, 상황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부랴부랴 권두언(卷頭言)을 작성하는 걸로 업무를 시작했는데 다행히 편집위원들이 워낙 알뜰하고 능력 있어서 몇 년 동안 직무를 수행하는 데 큰 불편은 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굳이 문제라면, 아무리 분기별 발행이라 할지라도 발행일이 닥쳐서 밀린 숙제를 하듯 후다닥 원고를 작성할 수는 없는 일, 제 진료실에는 늘 지필묵(紙筆墨)이 준비되어 있었고 문득문득 떠 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하루는 출근 버스 안에서 좋은 주제 거리가 하나 생각나 이따가 출근하면 정리하면 되겠다! 생각하고 진료실 안에 들어선 순간 아! 내가 무얼 쓰려고 했지? 싶은 게 정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조각도 떠 오르지 않고 정말이지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결국 그날 저녁 퇴근길에 조그만 다이어리를 하나 샀습니다. 늘 가지고 다니던 가방에 넣고 다니며 출, 퇴근이나 이동 중에 떠 오르는 단상을 가만히 적어 둘 심산(心算)이었습니다. 그 기억이 흐르고 흘러 어디에 퇴적되면 찾기라도 하거니와 이제는 다시 찾을 가능성도 점점 옅어져 가는 나이인 모양입니다.


친구는 스마트폰의 메모를 활용하지! 라며 한마디 하더라고요. 하긴 스마트폰의 메모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요즘 세대야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만 저처럼 아날로그에 더 익숙한 디지털 원시인은 그런 것보다는 펜에 더 먼저 손이 갑니다. 게다가 길을 가며, 건널목이나 횡단보도(橫斷步道)를 건너며 그 조그마한 기기에 정신이 팔려 신호등이 바뀌어도, 차가 달려와도, 사람과 부딪히기 일보 직전까지도 화면만 바라보는 모습이 조금은 지겨워서 그런 사람 중에 나라도 제외되자는 생각도 많이 깔려 있습니다.

내 생각의 밭에 돋아나는 싹들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날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알게 아니면 모르게 뿌려진 것이 많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부디 내 마음 밭이 풍성하면 좋겠습니다. 많은 결실을 보도록 늘 가꾸며 살펴야 할 텐데 그것이 지금 나의 큰 숙제입니다.




지금은 그 병원을 퇴사하고 원고를 넘기지 않아도 되는 직장에 근무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다듬을 수 있는 곳에 근무하고 있으니 그 또한 큰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에게 주는 답, 남에게 주는 열매를 늘 그리며 사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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