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지문사가 자리합니다.
저는 문구를 참 좋아합니다. 필기류를 선두로 하여 노트, 종이류 등등을 보면 거의 정신을 놓습니다. 서적을 주로 다루는 대형문고에 가서 책을 쭈욱 둘러보고 난 뒤의 목적지는 예측하시다시피 문구 쪽입니다. 그래야 그곳을 다 둘러보았다고 자평(自評)합니다. 오죽하면 저의 특이한 기행(奇行) 때문에 아내와 아들은 아예 다른 곳을 둘러보고 다시 시간을 정해 만납니다.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하여 마음 놓고 둘러볼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한번 일기와 다이어리를 언급하였으니 문맥으로 그 속편(續篇)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자판이나 디지털기기에 더 익숙한 세대나 작가들이 보면 샌님같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직은 손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아쉬움의 표현 정도로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때 글을 계량 또는 계수하는 잣대는 200자 원고지였습니다. 원고를 요구할 때 200자 원고지 몇 장 정도의 양이라고 지정해 주던 시정이 있었습니다. 요즘이야 A4 용지 몇 장 분량이라 지정하고 폰트의 크기도 10-12 정도로 정형화시켜 주지만 기억해 보면 그리 바뀐 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학교 다닐 적 원고지 쓰는 법을 배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글의 시작점, 문단의 변환, 띄어쓰기 등을 아울러 배우는 계기가 되기도 되었습니다. 당연히 워드 작업도 도구만 바뀌었을 뿐 배우는 건 같습니다.
디지털기기로 글을 쓰면서 수작업에 비해 편리한 점이 무어냐 묻는다면, 단연코 수정이 수월하다는 점입니다. 문맥을 고려하여 단어나 문장을 추가하거나 빼는 일은 원고지 작업에서 가장 진땀 나는 일입니다. 해당하는 페이지만 다시 쓰는 일은 그나마 감수할 수 있지만,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그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슬픔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만년필이나 연필의 사각거림은 내 귀에 캔디임에 분명합니다.
쓰지도 않을 걸 또 산다는 잔소리는 이제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제게는 생겼습니다. 아내도 내 취향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잔소리도 타박도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꼭 사용해야 맛인가요? 눈으로 보다가 간혹 간혹 한 번 써 봐야겠다. 싶으면 쓸 수 있는 것만으로 그 값은 충분히 한다는 지론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내 안에 게으름만 없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동네에 대형문구점이 하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른손이며 아트박스 같은 그런 브랜드가 아니라 그야말로 지역을 기반한 그런 문구점입니다. 그런데 말이 지역문구점이지 어지간한 대형문구점 그 이상입니다. 처음 이곳에 이사와 이 문구점을 보고 저는 환호했습니다. 거의 사랑에 빠질 정도였고 퇴근 때 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구매와 관계없이 반드시 들렀다가 귀가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마저도 시들합니다. 수익이 나지 않았는지 아이들 학용품, 등산용품 취급하는 곳은 정리되었고 규모도 처음에 비해 조금 더 축소되었습니다. 작년에는 지하가 식당에 임대되었습니다.
2023년 봄에 그냥 바라보아야 했던 영풍문고 매장의 철수, 그리고 대형문구점의 매장 축소를 바라보며 요즘 시류(時流)의 한 단면을 봅니다. 문구류도 서적처럼 온라인으로 대부분 구매하는 날을 바라보고 있으며 더 비약하자면 모든 걸 온라인으로 해결하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심하면 주변의 가게들도 굳이 건물 자체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 병원만 해도 간단한 물건 정도만 근처 가게에서 해결할 뿐 거의 모든 집기류나 도구들을 도매상이나 온라인으로 구매합니다.
오늘은 수술이 조금 한가해서 퇴근하고 문구점을 들렀다 갈 시간이 날 듯합니다. 기껏해야 내내 보던 것을 주로 보다 오겠지만 수익도 나고 사업도 번창해서 나 같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이 사라지지 않기를 빌뿐입니다. 바라보고 만져보고, 그리고 손에 넣는 그 과정이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