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말하는 건 때와 상황에 따라 만감이 교차하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상대방의 종교가 무엇인가에 관계없이 나는 크리스천이다, 말하는 건 특별히 조심스러운 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더 신기한 게 있다면 절대적인 숫자가 적었던 어린 시절에 비해 수적으로 양적으로 훨씬 비대해진 최근이 더욱 그러합니다.
그 이유를 짚으라면 우리는 이기적(利己的)인 교인들의 추태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의 성공, 부(富) 그리고 세상에서의 지위와 영화(榮華)를 목적으로 기복(祈福)하는 종교로 전락한 것도 큰 몫을 합니다. 영화 [밀양]이 흥행에 성공하고 굵직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게 한 그 이면에는 이미 대중의 속마음에 자리한 반감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저 활자와 화면을 통해 수면에 떠올랐다는 차이 밖에는 없습니다.
이 정도 되면 교회 내부에서도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을 어떻게 품고 살아야 하는지 재정립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만시지탄(晩時之歎)입니다. 개인의 성화(聖化)와 교회에 대한 헌신은 강조하지만, 몸을 담고 있는 세상에는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지, 그리고 이웃과 나라 더 나아가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계선교를 많이 한다고 내세우고 자랑하지만, 그 배후에는 교세의 확장과 공명심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것은 선교가 아니요, 그저 자랑이자 허영일뿐입니다.
사람들이 일요일이라 부르는 주일이 되면 교회 주변의 길과 골목은 온갖 자동차들로 몸살을 앓습니다. 교통체증은 물론이요, 주변에 주차된 차량은 그곳이 주차 금지구역인지 더 나아가 주변 주민의 분노 유발 구역인지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예배가 끝나고 나면 마음 가득 뿌듯함을 안고 다시 주차된 차량에 시동을 걸고 정리되는 데만 한참을 소모하고서 마무리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제가 늘 마음에 불편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온갖 범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람들이 옥중에서 또는 출옥 후 회심했다는 이유로 너도나도 목사가 됩니다. 그런 분이 설교하고 소리를 높이면 모두 한마음으로 아멘을 외칩니다. 그냥 뉴스거리일 뿐임에도 그것이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 보입니다.
종교가 생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함은 이제 기본적인 덕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나 혼자만의 만족으로 종교를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나라를 잃었던 시절을 뒤돌아보십시오. 종교를 가진 이들이 그들의 팔을 걷었고 목숨을 담보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어떤 종교인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처럼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게 종교가 아닙니다. 썩어 빠졌다고 손가락질받는 그 순간은 이미 썩은 내가 나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런 날을 위해 나부터 나서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