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하지는 않을까?
먹을 것을 보면 맛있을 것 같아 한 입, 아니면 궁금해서 한 입, 이렇게 평생을 지내다 보니 이제는 거꾸로 입에 대지 않으려 애쓰는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내 말대로,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할 때는 말을 안 듣더니 이게 무슨 고생이냐는 타박을 들을 만도 합니다. 그나마 이제는 적응이 돼서 조촐한 밥상을 보아도 그다지 아쉽거나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어릴 적 식탁과 오늘날 식탁이 다른 점을 굳이 하나만 고르라면 아마도 밥그릇의 크기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크기가 큰 것도 모자라 가득 담아 주던 시절이었지만, 그마저도 더 옛날에 비하면 작아진 것이라 했습니다. 기록을 통해 보는 조선시대까지의 밥그릇 크기는 그야말로 상상 초월입니다.
김이 솔솔 올라오던 흰 쌀밥 한 그릇을 최고의 호사로 치던 옛날에 비하면 요즘 밥상은 참 볼품없어졌습니다. 오히려 꽁보리밥에 나물 반찬이 건강식으로 대접받는 시절입니다. 저부터도 흰밥 구경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당뇨 때문에 그러한데, 덕분에 아무 질병이 없는 제 아내는 가끔은 흰 쌀밥 한 그릇을 내내 그리워하곤 합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살찔까 두려워 그나마도 절식하고 지냅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사성 질환이나 생활습관병 조금씩은 갖고 사는 시대를 삽니다. 그마저도 옛날과 또 다른 점이 있다면 관리를 받을 수 있는 여유와 인력이 많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조선시대의 왕들도 누리지 못하는 의학적 관리를 우리는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이마저도 세상이 바뀌면 우리 후손들은 우리 세대를 안쓰러워하겠지만 말입니다.
수술 환자를 대하다 보면 왜 그리 자기 몸을 험하게 다루었나 싶을 정도의 사람들이 종종 옵니다.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며 마취할 때 힘들어서 살짝 밉기도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자기도 관리를 포기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다시 마음을 바꿔 먹습니다. 자기의 노력에 비해 기대효과가 없었다거나,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안 되었다던가,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 등등이 있을 터입니다.
이 정도 안타까움의 끝에 드는 생각이었습니다만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는 소위 무응답에 내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나 하나 잘살자고 종교를 갖는 건 아니지만, 내가 사람에게 더 나아가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한다는 패배감이 든다면 이처럼 큰 패배감은 없을 것입니다. 신학적으로야 무응답도 응답의 일부이며 그것은 잘못 구하여 그럴 수도 있다는 가르침을 내놓지만 기대하며 기다리다가 받게 되는 실망감을 잘 마무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같이 고민하게 됩니다.
오늘은 그런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