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는 중입니다.
지금으로 따져도 겨우 책 하나보다 조금 큰 책가방을 둘러메고 학교 다니던 어릴 적 시내(市內) 라야 차 두 대가 겨우 다닐만한 2차로가 유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기차역이 그래도 전국에서 바쁘기로 알아줄 정도로 잘 뚫린 역전에서 경찰서까지 신작로가 생겨 4차로가 되었고, 그 경찰서에서 새로 옮겨 갈 시청까지 1km 정도를 역시 4차로로 확장하던 시절입니다. 시의 인구가 고작 10만을 못 채우던 당시이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요, 나라의 재정도 그를 감당하지 못하던 때이니 더욱 그러합니다. 자동차며 오토바이는 드문드문 있었고 그나마 잘 뚫린 길 위에는 우마차나 삼륜차, 일제 강점기부터 운행되던 투박한 트럭이 주름잡았습니다. 때로는 손수 끌던 손수레도 제법 많았습니다.
세단형 차가 하나 지나가면 누구 소유차인지 금방 알아볼 정도요 혹시라도 모르는 차가 나타나면 누굴까? 궁금해하기도 했습니다. 관용차로 주로 쓰이던 지프형 차가 지나가면 공무집행임을 눈치채고 알아서 비켜주고 비켜 가곤 했었지요. 공무원이라면 시청이나 군청 정도에는 근무하고 경찰서, 세무서, 법원 등기소 정도에는 근무해야 시내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습니다. 내가 누구인 줄 알아?라는 대사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던, 흔한 말에 속했습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우리 고향은 반듯한 시(市)도 아니요, 아기자기한 읍(邑)이나 면(面)도 아닌 얼치기 크기에서 심심치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살았습니다.
신한장이라 부르던 집 근처를 조금만 걸어 나오면 중앙시장 입구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이미 과거의 명성을 다른 곳에 넘겨준 지 오래이지만, 당시 이곳에서 몇 분만 서 있으면 내가 아는 사람의 상당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찬거리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되면 엄마나 할머니들의 발길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식사 시간이나 되어야 북새통 같던 시장은 조금이나마 숨을 쉬었습니다.
어느 초여름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 출입이 많던 시장 입구가 나의 하교(下校) 시간에 맞춰 갑자기 시끄러워졌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 꼬마이던 나와 친구는 그곳으로 눈을 돌렸고 사람들은 어, 어 하는 소리와 함께 벌떼 마냥 한 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달려갔지만, 그날따라 어른들의 억센 힘에 밀려 뒤돌아서야 했습니다. 내가 들은 소리는 이를 어째? 어쩌면 좋아? 이런 소리뿐입니다.
오토바이와 트럭이 서로 사고가 났답니다. 나 어릴 적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안전모 하나 제대로 갖추지 않았던 오토바이 운전자는 몇 배나 큰 트럭에 쳐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합니다. 그것도 머리를 다쳤는데 차마 글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끔찍했다지요, 아마.
그 사고 이후로 한동안은 등, 하교 시간에 그 길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들리는 소식도 끔찍했거니와 사고 수습을 어떻게 했길래 정몽주의 선죽교 사건처럼 벌건 표식이 제대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0이 넘은 내 기억이 이리도 생생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대신 골목 하나하나는 같은 방향이던 친구들의 단골 길이 되었습니다.
어릴 적 그리도 커 보이던 길이나 건물들이 이제는 현실이 되어 그다지 커 보이지도 않습니다. 길이나 건물이 쪼그라들지는 않았을 터, 그만큼 우리의 덩치가 커지고 안목이 커졌으며 우리의 생각이 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건 어릴 때의 우리 기억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일까요? 저랑 공통된 기억을 공유하는 아내도 고향을 들를 때마다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가, 길이, 장소가 저렇게 작았었나?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집에 먼저 도착하는 아이가 뒤에 남은 친구 집까지 동행해 주며 그 거꾸로를 두어 번 더 하던 하굣길. 생각해 보니 학년이 낮을수록 더 그리했습니다. 이제 친구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고 기억 속의 그 나이 정도 되는 손주를 기다립니다.
내 마음속의 따스함은 추운 겨울이 와도 이렇게 따스하게 무르익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