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소한 행복감
오늘 아침 같이 근무하는 직원에게서 선물을 받았습니다. 조그만 봉투 안에 들어있는 상자는 연한 분홍색 포장지에 정성스레 싸여 있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작지도 않은 그 곽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 함께 동봉한 편지에는 무어라 쓰여 있을까? 여간 궁금한 게 아닙니다. 궁금한 마음에 곧바로 뜯어본 상자 안에는 색깔도 영롱하게 예쁜 만년필 한 자루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앗, 파이롯트 만년필입니다. 모델명은 커스텀 742인데 아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제품으로서는 가장 대중적이고 평이 좋은 제품입니다. 필기구나 문구류를 좋아하는 제 취향을 저격한 셈입니다. 시필(試筆)을 해 본 순간 그 촉감에 황홀감까지 느끼게 됩니다, 하긴 몽블랑에 대항하기 위한 야심작이라 하니 그럴 만도 합니다.
아마도 제 서랍을 뒤져보면 여기저기서 두더지 올라오듯 숨겨진 필기구가 한두 가지쯤 은 나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업체에서 판촉용으로 두고 가는 필기구는 아예 내 몫이 아니라 생각하고 나눠주고도 그 정도입니다. 아마도 누군가 저장 강박이 아니냐 물어도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오랜만에 글을 쓰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의 첫 만년필은 빠이롯드입니다. 굳이 표준말에 따르지 않고 파이롯트나 빠이롯드로 표기하는 이유는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일단은 일본이 본사이기 때문에 그 표기를 따른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학교 다닐 적 종각역 근방을 지나다 보면 빠이롯드라는 큰 간판이 있었고 이를 기억하는 분도 참 많으실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요? 정확히는 파일럿이라 표기해야 할 그 이름이 2010년 이후에 파이롯트로 정착되었고 그 이전에는 대놓고 빠이롯드로 몇 십 년을 지낸 셈입니다.
만년필을 쓸 수 없는 초등학생 때 우리에게 빠이롯드가 각인된 것은 다름 아닌 샤프펜슬입니다. 파격적이었던 그 샤프펜슬도 최근에는 참 비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사실 영어로는 mechanical pencil이어야 하겠지만 샤프펜슬로 불린 데에는 이들의 작명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죽하면 영어로 대화를 하다가 불쑥 샤프펜슬 어쩌고 저쩌고 나오게 된답니다. 이런 전략적인 적극성 때문인지 일본 내에서 Sailor Platinum과 함께 3대 만년필 제조업체로 꼽히며 일본에서는 가장 큰 업체로, 미국에서는 다섯 번째로 큰 펜 생산업체라고 합니다.
만년필의 필기감은 가히 독보적입니다. 아무리 gel-ink를 사용하는 펜이 나와서 그 인기가 하늘을 찔러도 만년필에 비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이는 저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으나 반대편에 서 있는 분이라 할지라도 일정 부분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독특함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장점이 있을지라도 잉크의 보충, 잉크를 엎을지도 모르는 부담감, 손이나 옷에 묻힐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수많은 장점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참 얄궂기도 합니다. 잉크라는 것이 말입니다.
오늘도 이 펜 한 자루 덕분에 참 행복한 날입니다. 이 펜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이 일이 버겁고 부담스럽기도 하겠지만 손으로, 마음으로, 생각으로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좀 더 넓어지고 많아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