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처럼 많은 것을 얻으셨을까?
피천득(皮千得) 선생의 인연(因緣)이라는 수필집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한 10년 전에도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사이 종이도 바래고 세월의 때를 조금 입었습니다. 다른 건 둘째치고 교과서에서 접했던 인연이라는 수필을 한 번 더 보려는 속셈이 다시 발동한 것입니다. 주인공이 아마 아사코였는지 다시 확인도 해 보고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탄식도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그 후회를 안고 사셨는지도 쓸데없이 궁금하였던 요즘입니다.
선생의 다른 짧은 수필은 따님이신 서영이에 대한 글을 제외하고는 소위 후속 편은 거의 없습니다. 마치 지금의 드라마나 영화처럼, 인연 2 인연 3 이런 식으로 이끌지 않은 건 참으로 잘하신 결정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셨더라면 속편이 늘어갈수록, 전작(前作)에 아쉬움과 아련함만 민들레 홀씨처럼 속절없이 흩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금아(琴兒) 선생의 수필은 대체로 짧습니다. 그래서 이 책 한 권도 맘먹고 읽으면 반나절 정도에 후루룩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국에, 아니면 물에 밥 말아먹듯 해치우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작가는 그렇게 하더라도 금아 선생의 글은 그리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치 고개만 돌리면 내 주위에서 늘 볼 수 있는 나무요, 잔디 같은데 이들의 특징은 눈길을 줄 때마다 산뜻함을 선사한다는 데 있습니다.
선생의 본래 성품이 그렇게 번잡하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글의 어디를 보아도 반짝거리고 화려한 미사여구(美辭麗句)는 별로 없습니다. 그냥 무시로 사용하는 단어, 무심결에 툭툭 내뱉는 말로도 참 맛깔나게 글을 세우는 재주를 지니셨습니다. 선생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부엌에서 반찬을 만드는 엄마와 장모님 생각이 납니다. 그냥 양념이나 조미료를 넣고 몇 번 손을 놀렸을 뿐인데 밥상 위에는 늘 맛난 음식이 되어 올라옵니다. 엄청난 그릇에 담지 않아도 없어지면 더 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음식이 되는 것처럼 선생의 글이 딱 그러합니다.
살면서 인생을 이처럼 담백하게 살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기로 치면 내 삶의 롤모델(role model)이 어찌 금아선생뿐이겠습니까? 그분들의 빛깔 난 삶을 내게 담기에는 내 그릇이 너무 작습니다. 아니, 내 안에 못나고 못된 내가 너무도 많아 그분들이 자리할 공간이 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덕규가 불러낸 가시나무라는 노래를 종종 생각합니다. 시인과 촌장이라는 듀엣으로 활동하던 시절 부른 노래입니다. 물론 가사의 당신은 예수님(주님)입니다. 자아(自我)가 비워지지 않아 주의 가르침과 교훈, 말씀이 들어 올 틈이 없고 내 안의 가시들이 서로 부대끼며 울어댈 뿐 아니라, 새들조차 날아갑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한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이 노래 또한 극적인 클라이맥스가 없이 내내 잔잔한 곡조입니다. 그래서 더 처연하게 가슴을 파고듭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머리 안이 바람 부는 숲이나 바닷가의 파도 소리 같을 때 더더욱 생각나는 곡입니다.
이렇게 오늘 피천득 선생과 하덕규 씨, 두 분이 잠시 내 곁을 머물다 가셨습니다. 언제 불시에 또 찾아오실 테지만 이렇듯 번잡하지 않게 찾아오시는 분들이니 그냥 빈자리 넉넉하게 내어드렸다가 인사 없이 가셔도 그러려니 할 것입니다. 약속 없이 불쑥 찾아오실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