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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아 Jul 30. 2023

세 자매의 명절 문화 개선 투쟁기(5)

아동가족학 전공생의 글쓰기_2022 서울대학교 인권·성평등 에세이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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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난 나를 데리러 온 날 밤, 아빠는 여전히 화가 잔뜩 난 채로 엄마가 차린 술상 앞에서 방까지 목소리가 다 들리도록 엄마에게 우리를 나오게 하라고 시켰다. 나는 자기소개서를 써야 했기도 하지만 아빠와의 대화에서 어떠한 희망도 가질 수 없어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사실 아빠의 화난 얼굴과 일말의 사랑도 느낄 수 없는 성난 눈초리를 또 보기 싫었다. 그 눈은 너무나 무서웠고, 아빠를 혐오하게까지 만들었기 때문이다. 방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아빠의 첫 한 마디.


“좋다. 이번에는 너희들이 그렇게 원한다면 어른들보고 오시지 말라고 하겠다. 아빠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화가 난다. 너희가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인지는 들어봐야겠다. 첫째도 동생들이랑 같은 생각이가? 한번 발해봐라.” 


무거운 분위기 속 대화가 시작되었다. 언니는 답했다.


“우리도 엄마가 명절에 혼자 일하는 거 보기 싫고, 거들기도 싫다. 현아 고3인데 그 정도는 아빠랑 어른들이 배려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울면서 말하긴 했지만, 아빠와의 대화를 제일 어려워하는 언니가 용기를 냈음을 느껴 고맙고 대견했다. 그러나 이어진 아빠의 말은 기가 찼다.


“진심으로 실망이다. 어떻게 장녀가 돼서 동생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 줄 모르고 동생들 말에 휘둘리고 있냐? 그러고도 니가 맏언니라고 할 수 있나?” 


훌쩍이는 언니 대신 동생이 말했다. 


“언니가 장녀인 게 뭔 상관인데?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어른들이 안 오셨으면 하는 게 아니라 오신다면 다 같이 즐겁게 먹고 치웠으면 하는 거다. 그런데 어른들이 오시는 이상 그렇게 안 될 거 아빠도 알잖아.” 


그렇다. 근본적인 문제는 고3인 내가 아니라 성 불평등한 우리 집의 명절 문화였다. 나는 동생이 문제 상황의 본질을 잘 짚어줬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약간의 침묵이 이어졌고 다시 아빠가 말을 꺼냈다. 


“엄마가 가족을 위해서, 좋아서 하는 일인데 너희가 왜 난린데? 엄마는 며느리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거고, 그게 싫지 않댄다.” 


나중에 엄마에게 물어보니 엄마도 이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 엄마는 눈물을 훔치고 있을 뿐이었고, 아빠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낀 언니와 동생은 대화를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더는 듣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아빠에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후 방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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