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그냥과 어른의 왜

by 은진

나는 그날, 혼자 심각했다.

오후 햇살이 교실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던 미술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스케치를 마친 그림 위에 색을 얹고 있었다. 푸른 바닷가를 그리는 아이, 캠핑장에서 고기를 굽는 장면을 정성껏 칠하는 아이. 교실에는 온기가 바닥부터 차올라 기분 좋게 번지고 있었다. 다들 평화로웠다. 나만 빼고.


한 아이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만 해도 분명 놀이공원이 보였고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기구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위로 검은색이 겹겹이 덧칠해지고 있었다. 하늘도, 놀이공원도, 사람들도 구분 없이 점점 어두워졌다. 멈추지 않는 손놀림이 심상치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고개를 든 아이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입을 꾹 다문 표정에서 말로 설명되지 않는 거부의 기색이 읽혔다. 아이는 힐긋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크레파스를 쥐었다.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북북 세게 누르는 소리가 교실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끈적거리는 검은 가루가 아이의 손가락에서 손바닥으로 묻고, 책상 위로도 번졌다. 옆자리 친구들이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는데도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검게 변해가는 도화지를 보며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읽어내려 애썼다. 아동 심리와 관련해 읽었던 책 속의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건 거부다.’

‘분노일지도 몰라.’

‘무언가 부서뜨리겠다는 신호인가?’


나는 이미 혼자서 다큐멘터리 한 편을 찍고 있었다. 아이의 행동에 어떤 이름표를 붙여야 할지 고민하며 손을 내밀 타이밍만 쟀다.


이렇게 그렸어?”

아이는 크레파스를 놓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냥요.”


건드리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다. 머릿속에는 부정적인 해석들만 더해졌다. 검은색으로 덮는 건 감추고 싶은 게 있을 때라고, 끝내고 싶을 때라고, 리셋하고 싶을 때라고.


며칠 동안 그 아이를 유심히 지켜봤다. 일부러 급식 시간에 옆에 앉아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오늘 쉬는 시간에 뭐 했어?”

“놀았어요.”

“재미있었어?”

“아니요.”

“오늘 뭐가 제일 맛있어?”

“없어요.”


단답뿐이었다. 아이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무언가 대단한 실마리를 건져 올리려는 사람처럼 혼자 분주했다.


사흘째였나, 나흘째였나. 아이가 새 도화지를 꺼냈다. 잔디가 깔린 운동장을 초록으로 채우고, 운동장 양쪽 가장자리에 작지만 단단한 골대를 세웠다. 아이들과 축구공도 그려 넣었다. 제각각 흩어놓은 어수선한 풍경이었지만, 무엇을 하는 장면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날의 검정과는 전혀 다른 결이었다. 크레파스가 지나간 자리는 부드러웠고, 그날의 무거움은 온데간데없었다


“너, 그때 그렇게 검게 칠했었어?”

아이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그때요?”

정말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리고 축구공이 골대를 향해 굴러가듯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냥요.”


그냥이라고? 며칠간의 관찰과 걱정, 수많은 해석이 힘없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거부도, 분노도, 신호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쩌면 정말 ‘그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검정으로 뭔가를 덮어버린 그 순간, 이미 아이의 마음속에선 모든 게 끝났던 일일지도. 그동안 혼자 대서사시를 쓴 건 나였다.


아이들은 그림으로 마음을 드러낸다고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색을 단서처럼 들여다본다. 그런데 정작 아이는, 아무 일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날, 아이에게는 그저 검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색이 모든 감정을 삼켜주기를 바랐거나, 혹은 그저 검정이라는 색 자체가 주는 질감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설령 점심시간에 친구와 다투어 속이 상했거나, 계단을 오르다 기분 나쁜 말을 들었을지라도 그게 전부였을 것이다. 중요한 건 아이가 온 힘을 다해 그렸다는 것, 그리고 다시 그렸다는 사실뿐이다.


가끔 그날의 도화지가 떠오른다. 시커먼 색으로 덮인 하늘과 공원, 그리고 며칠 뒤의 평화로운 운동장. 두 장의 그림 사이에 내가 붙였던 무거운 이름표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스크래치 기법의 그림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