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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May 14. 2024

초록색 병

 끓는 물에 깨끗하게 씻은 숙주를 데친다. 심심한 맛을 좋아한 뒤로는 소금과 참기름만 넣게 된다. 먼저 소금을 살살 뿌리고 초록색 병을 열어본다. 얼마 전 방앗간에서 직접 짜온 참기름 냄새가 확 퍼진다. 조르륵 살짝만 떨어뜨렸을 뿐인데 진한 향이 느껴진다. 익숙한 냄새는 나를 고향집으로 내달리게 한. 부엌문을 열고 들어가면 숙주를 무치는 엄마손에서 아 하고 벌린 내 입으로 나물 한 움큼이 쏙 들어온다. 아삭하고 고소한 맛. 생각만으로도 침이 고인다.


 몇 번의 입원을 하고는 농사부터 그만둔 엄마. 시내에 있는 주간보호센터에 다니기 위해 아파트로 이사했다. 다른 짐은 그런대로 옮겼는데 깨자루만은 시골집에 남겼다. 마지막으로 밭일로 해서 얻은 참깨와 들깨는 자루에 담긴 채 덩그러니 윗방에 놓여있었다.

 

  남편과 나는 1년이나 묵은 깨를 이대로 두면 상할까 봐 가장 가까운 방앗간을 찾았다. 그곳은 엄마가 30년이나 넘게 이용한 단골가게다. 칠이 벗겨진 '태흥방앗간' 간판을 보고 들어갔다. 녹슨 기계들이 시끄럽게 돌아가고, 뜯긴 시멘트 바닥 위는 빨간 고무대야와 소쿠리가 쌓여있었다. 젊은 주인 양반이 있을 거라는 엄마 말에 아무리 찾아도 젊은? 주인은 칠십이 넘어 보였다. 뻘쭘하게 서있는데 주인의 시선이 느껴져 기름을 짜러 왔다고 했다.


 주인은 방앗간 구석에 있는 붉은색 대야를 가리키며 먼저 깨자루를 부으라고 했다. 남편과 나는 자루 중 가장 무거운 참깨를 먼저 부었다. 아주머니는 쌀을 씻듯이 참깨를 씻었다. 마치 밥을 하기 위해 조리로 쌀을 일어 돌과 부스러기를 가려내는 방법과 비슷하게 손잡이가 달린 스텐 체망으로 깨를 일었다.     

“이렇게 하면 돼요. 한번 해봐요!”

"이걸, 제가요?"


 우리는 기름병만 가져갈 생각을 했지 이런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 어! 이게 아닌데. 공임비를  나중에 오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방앗간도 처음인데 깨를 씻으리고 해서 둘은 한참이나 망설였다. 더구나 손목을 다쳐 깁스를 한 남편은 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바쁘게 돌아가는 기계 앞에 서있는 주인에게 많은 깨를 혼자 감당하라고 부탁하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쭈그려 앉아 손으로 이리저리 휘젓으며 깨를 씻었다. 쌀보다 크기가 작고 가벼운 깨는 가라앉지 않고 휘젓는 대로 둥둥 떠다니며 빙빙 돌았다. 일일이 손으로 잡는 건 불가능해서 아까 주인이 하던 그대로 해보았다. 스텐 체망을 이용해 대야 속에 물결을 일으키고 떠오른 깨를 스무 번도 넘게 건져냈다. 큰 소쿠리에 건져내고 또 건져도 아직도 남은 깨를 보니 벌써부터 다리가 저렸다.


 "이번에는 내가 해볼게."

 "진짜 다리가 아파! 소쿠리만 옮기고 자리 바꿔요."

 깁스를 한 남편의 제안은 미안하면서도 반가웠다. 겨우 참깨 한 자루를 했을 뿐인데 허리와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억!" 그만 일어서다 균형을 잃고 뒤뚱거렸다. 하마터면 씻은 참깨를 소쿠리채 바닥에 쏟을 뻔했다. 아주 큰일을 낼 뻔한 나는 아직도 남은 자루를 보며 한숨이 나왔다. 흙이나 이물질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씻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소쿠리에 담으면 된다. 쉬운 일 같아도 한 사람은 허리를 구부리고, 또 한 사람은 쭈그려 앉는 자세로 했더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겨우 깨만 씻는데도 내 엄살이 어지간했나 보다. 남편도 그만하라고 흉을 봤다. 자꾸 쳐다보는 주인아주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더 깊게 파인 엄마 얼굴이 느껴졌다. 여기 와서 매년 이런 과정을 거치며 기름을 짰을 것이다.


 우리가 씻고 있는 동안에 주인은 말끔해진 참깨를 가마솥처럼 생긴 기계에 넣고는 고열로 볶았다. 연기가 뭉글뭉글 나더니 타는 냄새와 함께 천장으로 문 틈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볶은 깨를 이번에는 둥근 철판 그릇에 넣고 무거운 기계로 내리누른다. 드디어 기다리던 주인공의 모습. 맑고 노란 참기름은 거품을 내며 김이 났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우리는 귀한 것을 구경하듯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걸 주인은 천천히 초록병에 옮겼다. 어느새 고소한 향은 삽시간에 가게를 둘러치고 있었다. 


 엄마의 허리가 구부러진 것은 어쩌면 참기름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동안 편히 먹었던 초록병 개수에 비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기름 냄새가 코끝에 닿을 때마다 아리고 아팠다. 개당 500원인 초록색 병에는 250ml 소주가 아닌 노르스름한 참기름이 가득하다. 연이어 들기름까지 담았더니 총 29병이나 되었다. 동생들과 나눠 먹고도 남을 충분한 양을 보니 '부모 등골 빼먹는다'는 옛말이 새삼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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