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주인과 손님들
시골집은 엄마가 아파트로 간 후로 아무도 살지 않는다. 빈집이라는 생각은 내 생각일 뿐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산스럽게 들락거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주인 행세를 하듯 마당이며 수돗가와 처마 밑까지 자신들의 영역을 알리는 흔적을 남긴다. 아마도 집주인의 존재 여부를 이미 알고 있는 눈치다.
처마 밑에 길고양이들이 자리 잡으면 눈치 빠른 들쥐들이 틈을 노리며 주변을 맴돈다. 마당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진을 치고 하루가 다르게 영토를 넓힌다. 기와 사이사이로 참새가 터를 잡고 물까치들은 지붕 위에서 뻐꾸기는 전깃줄에서 운다. 가끔 들르는 손님도 빼놓을 수 없는데 겁이 많은 고라니, 손바닥만 두꺼비와 뱀까지 나타나 주인 행세를 한다.
그중에 가장 주인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은 아무래도 길고양이다. 우리가 일주일마다 꼬박꼬박 시골집에 가는 이유도 고양이 때문이다. 지금은 두 마리만 남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섯 마리였다. 짐작건대 세 마리는 집을 나간 것으로 보인다. 치즈냥이로 불리는 생김새를 가졌는데 멀리서 보면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겼다. 그나마 얼굴에 점이 있다고 ‘점순이’로, 경계심이 무척 심해 ‘동글이’라고 부르며 구별한다.
이 녀석들의 어미의 어미의 어미도 길고양이다. ‘삼색이’는 시골 출신이 아니라 나름은 도시 출신으로 윤기 나는 털과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녔다. 버려진 삼색이를 데리고 온 우리 가족은 일부러 사료를 챙기며 시골집을 오래전부터 드나들었다. 그래도 길고양이는 집 밖에서 살기 때문에 사람과 거리를 둔다. 2미터 이상으로 멀리하고 곁을 주지 않는다. 야박하다고 탓할 수 없는 게 고양이로서는 우리가 외지인이었을 뿐 주인이 아니다. 삼색이는 집 주변 야산을 전부 자기 영역으로 만들더니 매일 어디론가 마실 가거나 다람쥐처럼 감나무에서 소나무로 날아다니듯 날쌔게 돌아다녔다.
삼색이 후손답게 점순이와 동글이도 재빠르고 날렵하다. 넓은 집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일주일마다 내가 나타나면 어디론가 쏜살같이 도망간다. 먹이를 주던 집주인(아파트로 이사한 엄마)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경계하는 눈빛만 남고, 윤기 흐르던 털은 볼품없이 빠져 초라하기만 하다. 이러다가 모두 떠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시골에 남겨진 고양이가 걱정된다고 하자 사람들은 별걱정을 다한다며 그냥 두라고 말한다. 알아서들 떠난다고. 길고양이들은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살기 위해 간다고 한다. 버티지 못하면 떠나는 게 당연한데도 나는 가지 않기를 바랐다.
집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세 못쓰게 된다. 집도 살아있는 것들이 있어야 숨을 쉰다. 생명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생명체들이 서로 사투를 벌이며 차지하려고 한다. 시골집 주변의 수많은 풀과 동물들은 벌써 그걸 준비하는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고양이가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틈틈이 집안을 노리는 들쥐들의 행동은 점점 대범해질 것이고 반갑지 않은 손님들마저 호시탐탐 염탐하며 자기 영역으로 만들 기회를 엿보고 있다. 묘안이 필요하던 중에 자동 급식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행히 지인으로부터 자동 급식기 2대를 얻었다.
“벌써 다 먹었네!” 급식기는 매번 갈 때마다 한 톨도 남지 않고 텅 비어있었다. 할 수 없이 또 한 대를 추가해 가득가득 먹이로 채워도 언제나 빈 그릇이다. 이웃 손님들까지 다 와서 먹고 가는 ‘맛집’으로 소문이라도 난 걸까? 오갈 데 없는 이 근방의 고양이들과 다른 손님들에게 소식이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그런 입소문마저 싫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양이를 붙잡으면서까지 집을 지키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처음에는 야산에 터를 잡아 손수 흙벽을 쌓고 기와를 올린 부모님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꼬리를 치며 마중 나오던 메리, 평상에 누워 보던 밤하늘의 은하수와 별자리들, 그리고 영화 속 당당한 배우를 보며 시골 소녀가 꿈꿨던 커리어우먼의 모습. 이런 것들이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시골집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그곳은 항상 나를 있는 그대로 대해 준다. 소나무 사이로 스치는 송진 향, 온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 박새와 검은등뻐꾸기 소리, 그리고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여기저기 자라는 것만 구경해도 좋다. 어쩌면 이 집은 지금의 나를 만든 살아있는 존재와 같다는 느낌이다. 그곳에 살지 않았다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료의 양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 걱정이 되긴 하지만 괜찮다. 들쥐나 뱀으로부터 집을 지켜주는 수고비라고 생각하니 아깝지 않다.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다. 주인 행세를 톡톡히 해주는 덕분에 시골집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잘 버티고 있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입장이 묘해진다. 매주 한 번씩 먹이를 주러 가는 우리는 ‘어쩌다 주인’일 뿐. ‘진정한 집주인’은 따로 있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