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인사의 뒷모습
졌잘싸.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이다. 졌지만 최선을 다해 싸웠으니 우리 그 과정에는 박수를 보내주자, 하는 응원과 격려가 담긴 말이다. 졌잘싸는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동료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흔히 동료라 하면 친구보다는 먼 사이,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사이. 경쟁이란 걸 서슴지 않지만 알 수 없는 전우애가 있어서 술 한 잔 정도는 편안하게 마실 수 있는 사이. 그런 인연이 아닐까.
일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해 내야 하는 나는 타인에게 동료가 있다는 사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언젠가 나도 가만히 생각해 본 적이 했다. 동료를 찾기 위해서 나의 일을 멈추고 잠시 방황을 허락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찾았다. 나에게도 동료가 있었다. 지든 이기든 오늘 최선을 다해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 나의 식물, 나의 강아지가 그렇다. 그런데 이거 뭔가 좀 이상하다, 동료를 찾기는 했는데, 식물과 강아지에게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나 싶었다. 일단 동료라 하면, 경쟁이란 단어가 조금은 어울려야 하는데, 이들에게 경쟁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러나 이들은 경쟁하지 않고도 매일매일 하루를 꽉 채워 잘 싸운다. 사람과의 공생에서 언제나 지는 위치에 있는 그들은 늘 졌잘싸로 통한다.
오늘의 졌잘싸들은 안녕하신가. 그들의 안녕은 매일 아침 내가 확인해야 할 일 중에 하나다. 우리 집 베란다엔 신혼 초 선물 받은 화분이 몇 개 있다. 푸르게 자라는 식물들 덕분에 작고 오래된 우리 집도 꽤 예쁜 집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건 식물이 주는 마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가드닝이 취미 거나 식물을 다양하게 알거나 큰 애정을 쏟지는 못해서 '식집사'까지는 아니지만 식물이 주는 기쁨을 경험하고 있다. 그 경험은 식물이 푸른 잎으로 유지되는 것이 결코 당연하게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적어도 누군가의 소유가 된 식물은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으로 새로운 잎을 틔운다. 소유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는 한 생명을 더 아름답게 살도록 하게도, 속절없이 죽게도 하는 일이다.
소유는 책임감이다. 나도 책임감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기로 한다. 조금 더 진지하게 그들을 키워보기로 했다. 그들을 위해 정성을 기울일수록 내가 생명에게 위안과 평안을 얻는 느낌은 역시 사랑이란, 그리고 마음이란 그야말로 '서로' 이어야만 가능한 일임을 알게 한다. 그렇게 식물을 키우는 나의 경험은 점점 더 소중해졌다. 집에 있는 식물들에게 고마움을 느낀 뒤, 언젠가 대구에서는 꽤 규모가 큰 꽃 시장에 들러 식물을 몇 개 사서 집으로 데려왔다. 우리 집으로 온 식물 중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것들도 있다. 식물들을 다시 살리려 노력했지만 도저히 되지 않았을 땐 종량제 봉투에 생명 없는 뿌리와 흙을 버린다. 처음 모습과 달라진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괜히 우리 집으로 데려온 건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의 책임감이 실패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식물에게 애도의 마음을 표한다. 인간과의 싸움에서, 아니 싸우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너는 너의 생을 나에게 맡겼는데 이렇게 죽는 걸로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죄책감이란 단어도 떠올려본다. 너의 뜻이 아닌 나의 뜻대로 했던 일들에 대해 반성한다. 겨우 식물하나 옮겨온 것 가지고, 키우다 보면 잘못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데 그걸 이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식물에게 너무 감정이입을 하는 건 아니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 앞에 무기력한 식물의 졌잘싸의 모습이 나와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싸움에는 언제나 규칙과 룰이 있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지켜야 하는 선이라는 게 분명히 존재한다. 싸움에서 조금 더 고상한 버전으로 가면 스포츠일까. 스포츠는 정확한 규칙과 룰, 그 안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기가 치러진다. 그 규칙이 명확하게 존재하고 경기에 임하는 사람들이 그 규칙에 동의할 때 스포츠는 비로소 스포츠가 된다. 진정한 승자와 패자는 그 규칙 안에서 존재한다. 규칙이 깨지면 승자도 패자도 무의미하다. 졌잘싸는 규칙이 존재하는 범위에서 통용되는 단어다. 그러나 우리 인간 세상에서 졌잘싸가 얼마만큼 보호받고 있는가. 하물며 다른 생명에게 있어서는 고려하지도 않는 영역이다.
식물에게 있어서 인간과의 경기는 과연 졌잘싸일까.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에서는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 이유는 성향이나 신에 대한 불복종 때문도 아니고 신의 비밀을 알아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세상과 분리된 유일하고 단일한 존재로 인식한 것이 바로 우리의 원죄인 것이다.(<다정한 서술자>, 26p)라고 서술하고 있다. 인간 스스로 졌잘싸를 포기한 것이다.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오직 승리자로만 남겠다는 이기심이 남은 것이다. 처음부터 불공정한 경기에서 이기고 지는 게임이란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가 죽거나 사라질 뿐이다. 나는 비록 우리 집 베란다에서 크고 있었던 식물에게서 이 고통스러움을 목도하며 어딘가에서 들리는 비명들이 이명처럼 남았다. 인간의 이기심, 유일한 존재로 착각하며 행하는 모든 순간들. 그곳엔 누군가의 죽음과 비명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라진다.
사람은 두 발로 걷는다. 두 발로 걷는다는 건 두 손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어디론가 향한 후 두 손으로는 무엇인가를 쥘 수도 있다. 그날의 내 두 손도 작은 식물을 내 집 앞 베란다에 옮겨놓았다. 나는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생명들을 옮겨놓았다. 나의 권한이었고 나의 능력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또 다른 능력이 있다.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한, 그것이 태초의 시간에 있었거나 미래에 있을 막연한 낙원이거나 바로 그곳에서의 일들을 현실에서 조금씩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 그를 위해 더 많은 생명의 뿌리를 심게 할 수도 있고 더 많은 동물들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일을 우월하게 해낼 수 있다는 것. 연약한 생명들이 졌잘싸로 끝나는 생을 막아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
나의 두발과 두 손은 그렇게 쓰고 싶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온몸으로 가 닿아야 한다. 싸움의 현장에, 경기의 최전방에 서야 한다. 나의 생각이 생각에 그치지 않기를, 내 두 발에 걷는 힘이 단단해지기를, 오늘 이 글을 쓰며 바란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강한 종이나, 가장 똑똑한 종이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유능한 소수가 만든 세상이 아닌,
평범한 이들이 작은 변화에 조금씩 적응하며
만들어 낸 세상이라고 하니까요.
새삼, 변화를 만들고 완성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변화를 두려워만 하거나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라고 생각했다면
조금은 생각을 달리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태풍이 지난 뒤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합니다.
계절도 변하는데, 우리 마음도 변하지 말라는 법은 없죠.
일상의 작은 변화로 오늘은 어제와 다른 하루였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