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모든 것을 덮는다. 이 명제의 탈을 쓴 전제를 믿느냐,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이 명제가 아닌 전제라고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사랑이 곧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장치들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덮는다는 말은 나를 꼼짝 못 하게 한다. 나의 자존심과 미련과 같은 진부한 생의 욕심 따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어차피 사랑이 모든 걸 덮으니 그것만이 남으면 될 일이 아닌가, 하며 허무한 생각에 방황할 때도 있다.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을 때 니체는 어떻게 말했을까, 종교는 어떻게 말했을까, 오늘날의 서술자들은 어떻게 말했을까를 찾는다. 적어도 내가 읽는 행위로 만난 결론들은 같았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결국엔 사랑만이 남는 일. 이뿐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명제는 언제나 전제가 필요하다. 사랑만이 남는 일이 되기 위해서는 오래 참음이 필요하거나 사랑 외의 모든 것들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 전제가 많아 사랑은 언제나 버겁거나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운 단어다. 그러나 사랑을 온몸으로 체득해 본 사람은 안다. 그 자체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랑이 흘러 너무 칠 때가 그렇다. 사랑이 흘러넘치는 순간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억울함을 토로하지도 않고 어떤 상황이어도 괜찮아지는 모든 상황이라는 것을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그 순간을 진실되게 경험했다면 사랑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사랑이 흘러넘치고 흘러넘치며 모든 것을 덮을 때 가능한 일이며 심지어 그 사랑은 다른 이들에게로 전파가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넘쳐흐르는 사랑, 즉 세상에 살면서 쉽게 만날 수 없는 그런 사랑이 있다. 그러나 한 번 그 사랑을 경험했거나 지켜봤다면 그땐 누군가에게 설명하거나 요구하지 않아도 어디서나 사랑이라 말하게 된다. 적극적으로 사랑이 발현된다. 우리 삶에 실제로 이런 일들은 존재한다.
흔히들 애정이 있어서 싸운다고 한다. 나에게도 인간관계에서 애정을 확인하는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삼총사였다. 20대 젊은 날 피디와 작가, 아나운서로 만난 우리는 방송국에서 언제나 상큼함을 담당했다. 지역 방송 특성상 젊은 인력이 한꺼번에 많아지는 건 쉽지 않은 일. 정규직과 계약직, 프리랜서라는 직책에 관계없이 우리는 젊다는 이유로, 꿈이 방송 일이라는 이유로 빠르게 친해졌다. 결혼의 시기도 비슷했다. 이상형은 달랐지만 연애하는 순간을 공유하며 오늘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커피타임도 즐거웠다. 사회생활과 방송이 어려웠던 건 물론이고 사회초년생인 우리들에게 쉬운 날들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우리는 함께했기에 즐거웠다. 서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상황과 같은 이야기를 공유했던 우리는 펼쳐지지 않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가능성을 확인해 줬다. 그건 우리들의 관계에 대한 돈독함을 확인하는 일이었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의미였다.
그러나 모든 마음이 하나가 되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정규직과 계약직, 프리랜서로 출발이 달랐던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방송사에서 계약직으로 방송작가 겸 다른 일들을 함께 맡아가며 일을 했던 나에게 정규직 시험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삼총사는 나를 응원해 줬고 나는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됐다. 결과적으로 잘 되지 않았다. 그 시험은 이미 내정된 사람을 위한 형식적인 시험이었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그저 나의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결과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근무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회사와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날지 몰라도 우리 삼총사는 변함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흩어졌다. 정규직은 승진으로, 프리랜서였던 그녀는 결혼으로 각자의 갈길을 가게 됐다. 나는 우리의 흩어짐이 단순히 상황에 따른 흩어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동안의 만남이 꽤 형식적이었다는 걸 반증했다. 위기의 상황에서 알 수 있었다. 삼총사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다. 하하 호호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우리가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사람들의 기대 때문에 생겼던 연극일 뿐이었다.
계약이 끝난 이후 나는 여러 지역을 오가며 프리랜서 방송작가로 일을 하게 됐고, 나만의 커리어를 쌓고 있었다. 결혼도 했고 정착도 했다. 나의 프로그램, 나의 사람들이 생겼고, 소중한 일상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 오랜 시간 잠잠했던 삼총사 단톡방에 메시지가 떴다. 삼총사 중 한 명이 임신 소식을 전했다. 과거의 우리가 그리웠던 건지, 오늘의 삶이 힘든 탓인지 그 시작은 알 수 없지만 아무렇지 않게 지난날 우리가 사랑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괜찮은 것처럼 그녀는 인사했다. 사실 나는 그 안부 인사에 당황했다. 우리의 관계를 깨지게 했던 그날의 일들과 나에게 상처를 줬던 그때의 말에 대한 사과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삼총사 중 한 명이 그녀의 글에 대한 답글을 달았다. '그래 잘 지내고 있으니 됐네, 지나간 건 뭐 어때.'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뭐 어때, '라는 말 뒤에 해야 할 말을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 어떻지 않았다. 나는 사랑했던 삼총사였기에 서로의 문제가 아닌 상황에 따라 태도를 달리했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기를 원했다. 지난 과거에 뱉은 말 한마디와 아직도 흉터가 남아있는 상처에 대해 사과는 먼저 필요한 일이었다. '뭐 어때, '라는 말로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가져다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의 마음이 같은 지점은 후회였을 거다. 사랑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젊은 날의 소소한 행복이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에 되돌리고 싶었을 거다. 나이가 들 수록 사랑이란 말은 조건이 너무 많이 붙는 단어가 되고 소소한 행복이란 사치와 같아지니까. 과거의 행복이 빛나는 날들이었지 않았을까, 회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을 회복하거나 후회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사과가 먼저 필요하다. '뭐 어때'라는 말은 타인의 상처와 과거의 오해들을 무시해 버리는 무관심과 무책임이다. 아무렇지 않은 마음은 상처가 아물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새살이 흉터 없이 돋기 위해서는 연고가 필요하다. 그대로 두어도 켜켜이 상처 위에 살은 차오르지만 흉터는 희미하게 남는다.
사랑은 분명 흘러넘친다. 그러나 사랑 전에는 반드시 흘러넘치기 위한 단단한 그릇이 필요하다. 그릇에 금이 가 있다면 새로운 그릇으로 바꾸거나 더 안전해지도록 틈을 채워야 한다. 진심 어린 사과는 새로운 그릇이 되게 하기도, 갈라진 곳을 메꿔주기도 한다. 외면하지 않고 상처를 직면하는 일.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사과를 먼저 직면하는 일. 우리는 이 순서를 기억해야 한다. 나는 삼총사를 사랑한다. 그때 그 시절의 우리로 온전하게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새로운 그릇에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고민 끝에 단톡방에 답장을 했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