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인사의 뒷모습
식당에 문을 열고 들어가 먼저 하는 일. 메뉴판을 찾으며 '안녕하세요.'를 말한다. 눈은 음식에, 나의 말은 사람에게 닿아 있다. 메뉴판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대답을 기다린다. '어서 오세요.' 대답은 내 인사에 대한 대답일 때도 있고, 먼저 다가온 환대일 때도 있다. 환대를 만난 공간에선 환대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사람을 찾은 후 메뉴판을 늦게 발견해도 괜찮다. 그런 곳은 먹기도 전에 벌써 음식이 맛있다고 느낀다. 환대를 맛봤기 때문이다. 음식을 다 먹고 난 후 '맛있게 드셨어요?' 또는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같은 말들은 상투적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불필요하지 않다. 때로 친절함이란 무료하거나 지루하거나 혹은 별 볼 일 없는 일이라 느끼거나 그렇게 치부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세상과 우리는 친절함이 없인 살아갈 수가 없다.
인류에게는 결국 친절함만이 남는다. 친절함이 창조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에게 친절을 베풀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한다. 성경에 따르면 신은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환경으로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후에 가장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모습이 좋았다고 말하며 '세상을 창조' 하는 일을 끝냈다. 인간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다. 말 그대로 창조였기 때문에 원론적으로 신이 인간과 세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과정과 결정. 모든 순간은 어떤 경우였어도 상관이 없었다. 말 그대로 '신의 마음대로'가 가능했다. 그러나 신은 그렇게 택하지 않았다. 인간을 위한 창조를 완성했다. 이 창조의 원리가 맞다면 우리는 친절함이 본성이다. 친절함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창조론을 옹호하겠다는 입장을 내세울 마음은 전혀 없다. 우리의 친절함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보고 싶을 뿐.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배려란 나의 수고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음식점에 들어가 주문을 하기도 전에 먼저 친절하게 인사를 하는 일. '안녕하세요'라는 나의 물리적인 말과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수고가 없다면 발현되지 않을 일이다. 친절은 수고다. 이 수고에 대한 의미를 아느냐, 그리고 누가 먼저 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친절의 유무에 따른 분위기를 경험하고 친절의 유무가 있는 사람으로 완성된다. 어떤 분위기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한 몫은 오롯이 자신뿐이다. 그건 창조원리와 같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거고, 그렇게 친절하거나 혹은 친절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거다.
이 수고로움을 애써, 자주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친절함이 어디에나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며 살아간다. 그런 사람에게는 신기하게도 그게 꼭 법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따라붙는다. 이쯤이면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내 삶에 친절함과 환대를 존재하게 할 것인지를 말이다. 그건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한 개인의 삶에 대해 '나 자신'이 주인으로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꽤 오랜 고행이 뒤따른다. 세상은 한 인간을 '수많은 인간 중 하나'라는 의미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강요하는 전락의 전략은 그야말로 허상이며 착각이다. 한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태어나지 않는다. 모두 각각의 몫의 세상으로 태어난다. '수많은 인간 중 하나'라는 인간은 지구상에 어디도 없다. 우리는 각자의 개인으로서 존재하며 그렇기에 저마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명확한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쉽지 않다. 세상의 '전락의 전략'에 쉽게 속기 때문이다. 친절함과 환대는 이에 속지 않는 사람들의 것이다. 환대는 '나'의 존재가 수많은 인간 중 하나가 아닌 세상에 둘 도 없는 존재로 인지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본능이다.
환대는 본능이기에 언제나 공짜로 존재한다. 환대는 그다음을 바라지 않는다. 온전히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환대는 신기하게도 또 다른 개별적인 환대를 만났을 때 개인과 공동체, 분위기와 사회, 나아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심지어는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공짜 환대가 펼칠 수 있는 넓은 스펙트럼을 평소에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말 그대로 환대는 공짜로 발현될 때 그 의미가 확장되는데 내면의 세상이 완성된 이들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존재할 때 형성되기 때문이다. 내면의 세상을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기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삶을 경험하며 깨닫는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자.
다시 식당으로 가보자, 식사를 하기 전 '안녕하세요'라는 친절한 인사로 손님을 맞이했는데, 상대방에게서 돌아오는 환대가 없다면, 즉. 아직 내면의 세상이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인사는 묵살되거나 또는 다른 방어적인 표정과 자세로 돌아올 것이다. 이 반응을 본 후 공짜 환대를 베푼 사람은 그다음 단계를 밟기가 어렵다. 상대방에게 맞춰 대화와 행동을 이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피드백이 반복되면 처음 시작했던 공짜 환대는 점점 유료 환대로 변하게 되고 나아가 환대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손님이 와도 인사하지 않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단순히 환대를 잃게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과정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환대를 지켜야 한다. 우리의 본성인 친절함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 무엇이든 연습을 하면 실력이 늘고, 반복하면 익숙해지듯. 우리 내면에 있는 환대와 친절함을 반복해야 한다. 본래의 나의 모습, 그리고 온전한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 공짜 환대를 통해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우리 개인은 기꺼이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밖에서 지내는 동물들,
나무들은 괜찮을까 걱정이 되다가도,
다음날 아침 오히려 활짝 핀 꽃을 발견하는 순간.
저 꽃은 무슨 힘으로 비바람을 견뎠을까 싶습니다.
관심 있게 지켜보니까요.
깊은 뿌리가 보입니다.
꽃은, 땅이 든든하게 지지해주고 있었습니다.
어느 시인은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인생이 추울 때 너를 만나
나를 꽃으로 대해 준 네가 고맙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나, 무더운 여름날에도
변함없는 땅처럼 우리의 뿌리를 지지해 주고
아름다운 꽃으로 대해 준 사람들이
여러분 곁에도 있기를 바라고요.
누군가에게 우리가
그런 존재가 돼 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