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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Mar 25. 2023

발걸음을 멈춘 순간

[연재] 인사의 뒷모습

계절은 발목을 붙잡는다. 때로는 계절의 하늘이, 때로는 어딘가에서 떨어진 낙엽이, 꽃잎이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가끔은 모든 것이 새롭다는 눈동자로 지나가던 고양이. 어디서 태어나 얼마큼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생명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나를 바라보는 난간 위 아슬아슬한 고양이가 나를 붙잡은 어느 날, 그 언젠가는 외출 후 한참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문 앞에 서성이고 있는 삶의 걱정거리가 나를 붙잡는다. 나는 이렇게 종종 멈춘다. 특히 계절이 변하는 날이면 계절의 온도는 나를 밀어내고 결국 멈추게 한다. 그렇게 오늘의 계절을 보게 한다. 이거 참 서정적인 일이다. 그런 날은 신의 섭리라도 알아차리고 있는 거 아니야? 착각도 해본다. 


최근 내가 멈췄던 때를 생각하면 그리 좋은 날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옆집에 살고 계신 할머니와 인사를 나눴다. 할머니는 당분간 집에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들 집에서 며칠 지내고 오신다며 꽤 무거워 보이는 장바구니를 양손에 들고 계셨다. 당신이 없는 동안 문 앞에 전단지 좀 떼어 달라는 부탁도 하셨다. 돌아와서 번거로운 일부터 하고 싶지 않다면서 말이다. 아들집에 가는 일은 속 시끄러운 일인데, 보고 싶으니 어쩔 수 없고 아들 내외와 잘 지내고 와야지 하는 다짐을 몇 번이나 했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아들 집에서도 할머니 집에서도 별일 없을 겁니다. 나는 행운을 빌었다. 목련이 피고 딱 이틀 뒤 비가 내렸다. 목련은 비 온 뒤 그다음 날 땅으로 떨어졌고 할머니 집 앞 전단지도 몇 장 쌓여갔다. 오실 때가 됐는데, 생각할 무렵. 아파트 복도가 소란스럽다. 할머니 집은 팔렸고 곧 새로운 이웃이 이사온다는 소식이었다. 두 손 무겁게 장바구니를 들고 아들집으로 향했던 할머니의 발걸음은 어디에 멈춰있을까를 생각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디서든 녹록지 않은 현실이 할머니에게도 있었다는 거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과 딱히 멈출 곳이 어딘지 방황하는 건 노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을까. 그 모든 상황을 대비해 우리는 짐을 싸고, 그렇게 온갖 것으로 꽉 채운 가방을 두 손 무겁게 들고 있을 지라도 삶의 방황은 끝맺지 못할 일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잠깐 멈춘 발걸음이나 반짝이는 것들을 보며 시선이 멈춘 일들은 오히려 손에 꼽힐 만큼 적다. 우리의 멈춤은 대부분 아쉬움과 방황, 두려움이나 포기의 단어 앞에 더 잘 어울린다. 그건 누구에게나 같다. 다만 멈춰 있을 때의 모습은 다르다. 누군가는 당장에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다시 걷기를 희망한다. 멈춤의 순간은 동일하지만 그다음 나아갈 방향은 전혀 다르다. 나는 할머니가 속 시끄러운 작은 일을 나에게 부탁하셨던 게 고맙다. 할머니가 없는 동안 전단지를 떼기 위해 할머니의 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며 할머니의 여정이 조금 가벼워지길 바랐다. 나는 다시 돌아오시는 날, 아들집에서 어떠셨냐고 물어보기를 기대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돌아오시지 않게 된 상황이 할머니에게 잘 된 일인가 싶기도 했다.


떨어진 목련을 밟으며 나는 썩는 법을 배운다. 멈춰있는 목련에게서 가만히 있는 법을 배운다. 우리 안에 있는 외로움이 인생의 홀로 있음을 깨닫게 하고 홀로 있을 때 결국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게 한다. 가는 길은 모두 같다. 출발 직전, 장바구니에 담겨있는 무엇인가가 다를 뿐.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할머니 집 앞을 서성이며 나의 장바구니를 잠깐 확인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비가 오고 지는 것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보면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젖는 게 당연합니다. 


아무리 우산을 쓰고, 우비를 입고 나간다 해도 

사방에서 내리는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죠.


살면서 외롭다, 허무하다 느끼는 순간들이 찾아올 때 

어디에나 내리고, 모두를 젖게 하는 비를 생각하면

그런 순간들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하는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잠잠히 비가 그치기를 

가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 같네요.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지나고 계신가요. 

조급한 마음 잠시 내려놓고 잠잠히 기다려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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