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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시대...

어느 노인의 첫사랑 이야기...(7)

by 조원준 바람소리

소년은 소녀의 마음이 내게로 온 것 같아서 마음이 포근해졌다. 라켓과 공을 가지러 가자 나를 쳐다보는 탁구장 여직원의 눈빛이 전에 할머니가 둘을 쳐다보던 눈빛과도 같았지만 개의치 않고서 변함없이 꼿꼿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소녀에게 공을 보낸다. 운동은 아예 소질이 없는지 아무렇게나 쳐버려서 스트로크 랠리는 거의 단발로 끝이 나고 그래서 공을 주우러 다니는 시간이 더 많지만 소년은 마냥 즐겁다.

소년의 머릿속에는 다음에는 심심하지 않게 무엇을 해줄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어 가끔씩 소녀가 한 마디씩 한다. “공 좀 똑바로 던져 줄래?” 그 소리가 안 들리는지 못 듣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딴생각을 하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소녀를 즐겁게 해 줄 놀이나 이벤트는 아니었지만 기념으로 오래 간직할 만한 것을 주고 싶었다. 생각해 낸 것이 증명사진이었는데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며칠 전에 붕어빵을 살 때처럼 돈을 마련해야 했다. 잔머리에 능한 소년은 아니었는데 소녀를 위한 것이라면 그런 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리 끝에 주 고등학교 진학에 필요한 서류에 붙일 사진이라는 묘수를 찾아서 돈이 필요하다고 하니 어머니께서는 선뜻 주신다. 넉넉히 주시면서 “남으면 꼭 가져와라”라고 하는데 부드러운 한마디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약속처럼 무겁게 들렸다.


사진은 기본 4장으로 금액은 생각나지가 않지만 돈이 여유로워서 두 번을 찍기로 했다. 한 번은 교복을 입고 단정하게 찍었고 두 번째는 탁구시합 나갈 때 입었던 운동복을 입고 삼촌의 애인인 예비 숙모께서 겨울 찬바람에 머리가 시리다고 쓰고 다니라고 짜준 털모자를 쓰고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둘 다 잘 나왔고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이 보기에 근사해서 이 사진을 소녀에게 정표(情表)로 꼭 전해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시간은 흘러서 소녀를 처음 본 날부터 2주가 넘었고 둘은 많이 가까워졌다. 소녀는 처음부터 탁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탁구뿐이었다. 어찌 보면 무료해질 수 있는 일상에서 그 선배가 챙겨주는 시간은 호기심에서나 심심타파였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런 상황들은 개인이 가진 능력의 유무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바로 소년이 처한 현실이었다. 여느 날처럼 오후 시간에 만난 둘. 소년은 평상시와 같이 운동하자며 라켓을 가지러 가는데 또 그 선배가 들어왔다. 숨이 턱 막힐 것 같았다.


“큐미 있었네 오빠랑 제과점 갈까?”

선배는 제법 믿음직한 말투로 소녀를 이끌지만 소녀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젓더니 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보이듯이 짧게 대답을 한다.

“아뇨~”

“원준이하고 놀러 갈 거예요”


소년은 선배의 등장으로 인해 우울하고 상심이 가득했던 모습에서 단번에 하늘로 날아갈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밀가루 풀빵이 제과점의 고급 빵을 이기는 순간이었고 승리자가 된 기분이었다. 선배는 의외인 듯 쳐다보다가 그냥 있기가 머쓱했는지 약속을 깜빡한 듯이 중얼거리면서 탁구장 문을 열고 나간다.


소년은 어린애가 되어 어딜 가느냐고 묻자 소녀는 빙긋 웃으면서 그냥 따라오라고 하면서 자기가 마치 이곳에서 오래전부터 사는 사람이어서 좋은 곳을 아는 것처럼 오늘은 탁구 치지 말고 밖으로 놀러 가자고 한다. 짐작으로 며칠 전에 큰아빠 따라서의 사무실에 갔던 시간이 좋아서 거기가 아닌가 했다.


밖으로 나가자 하늘은 금방 눈이라도 올 것 같은 잿빛이고 바람은 없지만 냉기가 목덜미를 스쳐서 털모자를 잡아 다녀 귀를 덮으면서 소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바로 앞서간 소녀의 뒷모습을 보니 오르골 보석 상자의 뚜껑을 열면 멜로디에 맞춰서 춤을 추는 발레 요정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가는 길을 보아하니 우리 집으로 가는 방향인데 산과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 만나는 갈림길에서 소녀는 잠시 멈춰서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더니 짐작대로 공원이 있는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공원으로 가는 오솔길은 눈을 감고도 다녀도 될 만큼 소년에게는 익숙한 곳이었고 공원 중턱에 있는 아저씨의 사무실 앞에는 몇 개의 조각상과 시소, 그네, 평행봉 철봉 등 놀이와 운동기구들이 있어 공원 자체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서 노는 놀이터였다. 오솔길 중간쯤에는 수령이 몇 백 년 된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여 카핏처럼 깔려 있고 바스락 소리와 함께 걷는 길은 둘이서 주례 선생님 앞으로 가는 상상을 한 순간 잿빛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소년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솔길에서 눈이 오자 소년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음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하는데 하나는 이 길이 끝나기 전에 손이라도 잡아서 본인의 마음을 보여줘야 한다는 조급증과 또 하나의 생각은 이렇게 무례를 범하면 자칫 불량소년으로 낙인이 찍혀서 앞으로는 아예 볼 수도 없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소년은 후자를 택했다. 조심스러운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아직은 너무 이르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한겨울에도 날씨가 포근하여 눈 구경이 힘든 완도는 겨울 내내 한두 번 올까 말까 한데 그 눈이 오늘 온 것이다. 눈은 아쉽게도 금세 그쳤다. 건조한 바닥에 먼지가 나지 않을 정도였지만 젖은 물기로 놀이터의 놀이기구에 앉을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시소나 그네는 초등학생들이나 타는 거지' 하면서 소년은 산 중턱 다음 코스로는 본인이 안내를 한다면서 소녀의 손을 잡아 끈다. 얼떨결에 덥석 잡아본 손은 용기도 필요했지만 다음 행선지로 꼭 가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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