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부터는 경사가 가팔라서 꼭대기까지는 층층이 놓인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한 계단씩 오르면서 숨이 차 뒤돌아 보니 바로 앞에 바다지만 호수 위에 정자처럼 떠 있는 천연기념물 주도(珠島)가 보인다.
잠시 쉼을 멈추고 공원 정상에 오르니 키가 훌쩍 더 커진 듯 사방이 트여서 저 멀리 리아스식 해안 따라 펼쳐진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공원 정상에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현충일에는 동네 어르신과 근엄하게 제복을 입은 높은 분들이 이곳에서 제를 지내서 신성한 곳으로만 여겨졌다.
탑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큰 숨을 들이쉰 후 양손을 입에 모아서 "야호~!!!"하고 외치자 메아리가 돌아오기도 전에 소녀가 말을 한다.
“원준아... 나 두 밤만 자고 나면 서울로 올라가”
엄마가 걱정되어 예정보다 더 일찍 데리러 온다고 했고 그래서 그동안 고마워서 오늘은 나랑 같이 있고 싶었다고 한다. 소년은 메아리를 대신 듣는 소리에 갑자기 충혼탑이 와르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에 내리는 눈은 진눈깨비로 바뀌었고 이번에는 그치지 않는 눈을 어깨가 다 젖도록 맞았다. 중턱을 지나서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오솔길의 낙엽은 내리는 눈을 맞아 소년의 마음처럼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갈래길에서 소년과 소녀는 아무 말없이 한참을 서있었다.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보았지만 마음은 이미 답답해져 있었다. 이렇게 헤어질 거라고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았는데 시간이란 영원히 머무르지 않은가 보다. 아쉽고 또 아쉬워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가 않아서 할 수가 없었다.
내리자마자 물기로 변해버리는 눈을 보니 함께 지냈던 모든 순간들이 봄날의 꿈과 같았다. 소년은 탁구장으로 가는 골목길로 사라져 가는 소녀가 굽어지는 곳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키고 있다가 집으로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오솔길에서 손을 꼬옥 잡아서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의사 표시를 하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집 옆 계단을 내려올 때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진눈깨비로 변한 눈으로 바닥이 젖어서 그랬기도 했지만 마음 상태가 젖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올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하였고 쓰고 있던 털모자 덕분에 머리가 젖지 않고 따스하여 벗고 싶지 않았는데 집에 들어오자 어머니께서 야단을 치신다. "감기 들면 어짤라고 비 맞고 댕기냐" 저녁에는 군청에서 단체 손님 오니까 도와주라고 하면서 꼴 보기도 싫은 모자 벗고 젖은 머리를 말리라고 하면서 마른 수건을 던져준다.
어머니는 삼촌과 연애 중인 예비 숙모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그분이 짜준 털모자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속으로 '그분도 참 힘들겠구나'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란 어른 아이 떠나서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진눈깨비마저 기온이 높아서 겨울비로 변해 버렸고 내 몸과 마음 상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우산을 털고서 접은 손님들이 삼삼오오 식당 문을 열고서 들어온다.
소년의 집은 읍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5층 여관 다음 두 번째로 높은 3층 건물의 식당이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께서 피땀으로 지어 올린 식당에서 번 돈으로 5남 1녀의 자식들 모두 중학교를 졸업하면 대도시로 유학을 보냈다.
집안의 넷째로서 차례가 되어 광주로 유학을 앞둔 소년은 식당 1층의 제일 큰 방 아랫목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서 누워있었다. 밤새 몸살을 앓으며 자다 깨다를 여러 번 했었는데 꿈을 꿀 때마다 나쁜 꿈이 이어졌던 것 같았고 자력으로 깰 수가 없어 잠은 며칠 동안 계속해서 잔 것 같았다.
기억을 돌려 보니 어제저녁 무렵 어머니께서 눈을 맞고 돌아다니면 감기 든다고 하였지만 꼭 그것이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녀에게 서울로 올라간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머리는 넋이 나간 듯 하얘졌고 몸에 미열이 생기면서부터 오한이 들기 시작하여 소녀와 헤어진 다음 집에 와서 가까스로 식당 일을 돕고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수저를 놓고 할머니와 함께 자는 2층 내실로 일찍 올라왔다.
밤이 되자 미열이 고열로 변하고 편도가 부어 온몸이 욱신거려서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아팠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파본 적은 없었다.그리고 이대로 죽진 않을까? 했는데 아침이 되자 삼촌 따라서 병원에 갔다가 온 후 이 자리에서 줄곳 몸을 추스르고 있었던 것이다.
주사 덕분인지 열이 내리자 좀 살 것 같았는지 어젯밤보다는 잠이 편하게 깊게 들었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나타난 소녀가 내게 속삭이면서 말하기를 서울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살 거라고 말을 하는데 꿈에서도 너무 기뻐서 약속을 다짐받는 순간 일하는 아줌마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면서 나를 깨운다.
"원준아 밖에서 누가 너를 찾는다"
잠에서 깬 순간 꿈이 하도 허망하여 허탈한 마음에 만사 귀찮다는 듯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어떤 여학생이 현관 앞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니 여자 친구냐?"라고 묻는데 이불을 얼른 걷어내면서 직감적으로 큐미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꿈이 맞아서 혹시 상황이 바뀌어서 서울에 안 갈지도 모르다는 기대감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현관 앞까지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