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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시대...

어느 노인의 첫사랑 이야기...(9)

by 조원준 바람소리

“큐미구나... 밖이 추운데 들어오지 그래”

“응 아니야 나 내일 엄마랑 서울로 가는데 탁구장에 하루종일 기다려도 네가 오지 않아서 탁구장 언니에게 너희 집을 물어서 왔어”

“오늘 왜 안 왔어 걱정되고 궁금하고 했어...”

“응 조금 아팠어 괜찮아 감기야”

“많이 아팠네 아프지 마 원준아”

걱정이 섞인 미소가 예쁘다. 소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어...”

“그래 잘 가 큐미야...”


꿈은 반대라더니 소년은 울컥 받히는 울음을 삼키면서 겨우겨우 인사를 나눈다. 아픈 표정을 지어서 상대에게 걱정을 얹혀주고 싶었다. 더 아픈 척 보이고 싶은 것은 내가 이렇게 아픈 것은 너 때문이야 그러니까 나를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는 하소연이었다.


소년은 언제 또 오냐고 묻지 않았고 끝내 연락처를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소녀가 먼저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컸지만 그 당시 왜 그런 자존심이 필요했을까? 멋있는 척하고 싶었을까?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했던 그 고집은 지금까지도 여전한 것은 소년의 성격이기도 했다. 소녀는 이제 재회 약을 할 수도 없는 먼 곳으로 다시 돌아가버렸다.


소녀가 떠나간 후 한동안 소년의 마음은 속이 다 비어버린 것 같은 허무한 심정으로 살았다. 성인들만큼의 아픔은 아니라 해도 이것이 이별이라고 생각했고 어린 나이지만 패티김의 이별을 애창하면서 스스로 많은 위로를 했었다. 많이 보고프면 충혼탑이 있는 공원에 올라가서 소녀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탁구장에서 운동으로 땀을 쏟아내곤 했다.




소년에게는 소중한 추억을 안긴 짧고도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중학교를 졸업하자 소년은 도청 소재지가 있는 대도시 광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도 내 각 군(郡)에서 나처럼 유학 온 학생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대도시의 유학 생활은 내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소년의 유학생활은 난생처음 겪었고 지독히도 길게 간 향수병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별의 아픔이 채 아물기도 전에 해괴한 병까지 겹친 소년의 하루하루는 가혹한 형벌을 받는 것 같았다. 무인도에 나 홀로 있는 듯한 고독감과 밀려드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게 이런 시련이 올까?... '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년은 하숙집 방에 틀어박혀서 공부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고 또 다른 이유는 고향에서 다달이 유학비로 전신환으로 부치는 적지 않은 돈 삼만 원씩을 받는데 고생해서 번 돈을 보내 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좋은 성적으로 보답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크게 작용을 하였다.


유학 초기 한창 클 나이에 하숙집 밥이 부족하여 항상 배가 고팠기에 더욱 집이 그리웠고 고향친구들이 생각났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헤어진 큐미 생각까지 겹쳐서 이모저모 우울한 심정을 잊고 달래기 위해서 주말이면 함께 유학 온 친구들과 자주 만났었다.


광주는 도청 소재지답게 거대 도시처럼 보였다. 소년이 살던 시골에서는 볼 수가 없었던 도청 앞 큰 분수대를 회전하여 돌면 왕복 8차선 대로 주변의 고층빌딩과 큰 차들이 꼬리를 잇는 신작로, 널따란 횡단보도 앞 신호등을 건너서 사람의 인파로 오가는 도심 내 시가지를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정신없이 걷다 보면 스치듯이 나오는 영화관, 제과점, 분식점 등은 가고 싶은 신천지 속이었고 주말에 친구들과 들리는 단골 코스가 되었다.

여름방학 이후에는 차츰 유학 생활에 적응이 돼가면서 학교에서 친구들도 생겨났다. 천성이 밝고 명랑하여 개그 기질이 다분했던 섬소년이었다. 드센 사투리 억양으로 제스처를 쓰면서 웃겼던 것이 재미가 있었는지 하굣길엔 영원한 우정을 나누자던 친구들이 늘 함께했다.(친구 다섯 명은 지금도 연락을 하고 만나기도 하면서 함께 늙어가는 중이다.)




첫사랑만큼이나 내게 소중하게 남아있는 유학 시절... 당시 하이틴들에게 이성에 대한 새로운 꿈을 안겨주면서 최고의 흥행작으로 꼽히는 영화, 이덕화와 임예진이 출연했던 '진짜 진짜 좋아해'를 보면서 서로의 주고받는 마음이 그 당시 소년과 소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대리만족을 하고 싶어서 개봉관에서 내려와 동시상영을 주로 하는 천변 옆 계림극장에서 재상영할 때 혼자 가서 봤던 기억이 나고 혜은이의 맑은 음성은 아직까지도 귓가에 맴돈다.


모 방송국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라디오프로그램이 있었다. 지방 방송이지만 진행하던 DJ의 인기는 대학과 고교를 통틀어서 현재 아이돌 그룹만큼 인기가 높았다. 감수성 예민했던 사춘기시절에 끝까지 맺을 수가 없었던 첫사랑의 사연을 영랑의 詩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대신하여 적어 방송국에 보내 며칠 후 사연이 나올 즈음에는 귀 기울여 들으면서 어느덧 소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잘 있지 큐미야...'


친구 중에 이성교제를 한 애가 있었는데 나에게 여학생을 소개해준다고 했었다. 웃으면서 거절을 했었다. 나에게는 이미 여자 친구가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헤어진 소녀를 말함이다. 서로가 떨어져서 나의 행실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도 지조를 지켜야 하는 것이 소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자 새로운 생활에 적응이 됐는지 소녀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래도 겨울이 되어 소녀가 떠오를 때면 그녀는 분명 어느 날 하늘나라에서 길을 잃고서 내가 살던 곳으로 잠시 놀러 온 요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춘기 시절 내내 하나밖에 없는 나의 유일한 여자 친구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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