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디자이너가 대체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2026년, 어느 날. 디자이너는 Figma를 열기도 전에, 오늘 사용할 시안을 확인한다.
컬러는 AI가 추천한 값 중 전환율이 높은 조합, 카피는 A/B 테스트 결과 가장 반응이 좋았던 문장. 레이아웃은 시선 흐름과 클릭 데이터 기반으로 자동 배치되었다.
디자인은 툴이 먼저 시작하고, 사람이 나중에 확인하는 일이 되었다.
그럴듯하고, 정갈하고, 빠르다. 그런데 그 앞에서 디자이너는 문득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결정하고 있는 걸까?”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보다, 이미 그 변화가 내 앞에서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미래의 초입에 서 있다.
툴이 점점 더 똑똑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야한다.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이걸 이렇게 만들어야 하지?’라는 방향의 문제다.
그리고 그 방향은, 화려한 결과물 뒤가 아니라, 그 전에 존재하는 것—기획에서 부터 시작된다.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종종 너무 매끄럽다. 완벽한 균형, 정제된 레이아웃, 정확한 컬러 배합. 하지만 그 결과물이 왜 존재하는지, 그 이미지가 이 순간 왜 필요한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건 아직 사람의 몫이다.
디자이너의 기획력이란, 이미지의 탄생을 앞당기기 위해 존재하는 사고의 지도다.
기획은 레이아웃이 아니라 결정의 흐름이다. ‘이게 더 나아 보인다’는 직감보다 ‘이 구조여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태도다.
실무에서 기획력이 드러나는 순간은 의외로 일상적이다.
기획이 있는 디자이너는 회의에서 묻는다.
“이 목적이라면, 사용자 흐름은 이렇게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이 제품은 결국 뭐라고 기억되었으면 하세요?”
기획이 없는 디자이너는 결과를 두고 말한다.
“이게 더 예뻐 보이지 않아요?”
“요즘엔 이런 스타일이 대세니까요.”
전자는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결과를 소비하는 사람이다.
디자인이 넘쳐나는 이 시대, 소비자는 많고 설계자는 적다. 그래서 기획자는 귀하다.
AI는 지시받은 대로 잘 수행한다. 하지만 ‘무엇을 지시해야 하는가’는 여전히 사람의 책임이다.
디자이너가 기획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는 AI가 만든 결과물 중 그럴듯한 것을 골라주는 사람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결정자가 아닌, 수용자다.
툴은 늘어나고 기능은 정교해지겠지만, 질문의 방향을 설정하는 사람만이 그 모든 도구를 지휘할 수 있다.
훌륭한 기획자는 질문이 빠르다. 툴을 켜기 전에 이미 ‘이 디자인이 어떤 감정을 남겨야 하는가’를 상상하고 있고, ‘무엇은 보여줘야 하고, 무엇은 숨겨야 하는가’를 판단하고 있다.
기획은 결과가 아니다. 그 결과를 가능하게 만드는 공간과 시간을 설계하는 일이다.
지금은 ‘시각적 결과물’보다 ‘보이지 않는 구조’를 세우는 사람이 더 오래 남는다.
예전 : 생각 → 손으로 표현 → 툴로 보정
지금 : 질문 → 툴이 출력 → 사람이 정제
앞으로 : 구조 기획 → AI 실행 → 사람이 맥락화
앞으로 디자이너는 무엇을 얼마나 잘 그리는가가 아니라, 왜 이 방향이어야만 했는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인가로 평가받는다. 툴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툴이 따라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상상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기획은 그 상상을 논리, 흐름, 구조, 맥락으로 번역하는 일이다.
기획력이 있는 디자이너는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그림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건 단지 직무의 확장이 아니라, 디자이너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AI 시대에 다시 정의하는 일이다.
이제 누구나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시대다. 도구는 손보다 빠르고, AI는 감각까지 흉내 낸다.
이런 세상에서 디자이너는 가장 빨리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만들지 결정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2025년의 디자이너는 더 이상 이미지의 제작자가 아니다.
그는 의도를 설계하고, 맥락을 구축하고, 의미를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다.
기획은 질문을 품은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언어이자, 이 시대의 디자이너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할 사고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