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원수가 되지 않을 정도만

by 나예스

누가 '기호 식품'이라 했던가. 술은 어릴 적부터 우리 집에서 재앙의 상징이었다. 왜 마시는지는 알 수 없었고 냄새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중독인 아빠는 술을 즐긴다는 표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술이라는 원수는 멀쩡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드는 화학약품이었다. 속상하면 마시는 것, 마시고 나면 3주 동안 가족들에게 지옥문이 열리는 것, 몸이 견디지 못할 때쯤 끊고 나면 당분간 평화가 찾아오는 것.

"나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주방 앞에 늘어선 술병, 어릴 때는 델몬트 유리병에 보리차를 담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냉장고 문쪽에는 한때 소주가 담겼던 큰 펫트 라벨지를 제거하고 씻어 거기에 식수인 보리차를 식혀 담았다. 그럴 때마다 증오스러운 술을 상시로 떠올려야 했다. 나 비록 술병에 든 물을 먹고 있지만 성인이 되면 술과 담배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될 때 배우자가 될 사람도 당연히 술을 거의 못 마시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정하고 온순한 성격의 남자와 결혼한 것은 가정의 평화를 가장 우선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특히 술을 마실 때 거칠어지지 않는지를 염두에 두고 만났다. 지금까지도 그의 성격이나 술자리에서 위험신호를 느낀 적이 없다. 나와 만날 때마다 자주 친구분들 술자리에 가서 인사를 시켰다. 둘이 보는 일보다는 8명 내외로 보는 모임들이 그 자체로 데이트가 될 때가 많았다. 사교성이 남달랐던 것이었다. 나도 여러 모임에 동행할 때마다 언니 오빠들이 잘 챙겨주셨고, 자주 보다 보니 이젠 남자친구의 친구들이 내 친구같이 편하게 느껴졌다.


같이 호프집도 가고, 여행도 가고 따라다니는 건 늘 늦은 시간까지 즐기는 술자리였기에 나도 자연스럽게 맥주 주량이 늘어났고, 내가 취하면 재미있다며 먹여 주시는 언니들에 의해 자주 취했다. 하지만 한이 많았나 보다. 늘 내 주사는 울음으로 끝났다. 나도 우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주사가 우는 거라지만, 울음은 양반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진정한 술주정은 겪지 못한 평화로운 가정에서 자란 게 분명했다.


필름이 끊긴 다음날 일어나면 부은 눈으로 구토를 하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모습과 닮아간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들었다. 다시는 술 취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음 술자리에 가면 "저는 조금만 마실게요."로 시작하지만, 결국 실컷 울고 나서 필름이 끊겨 집에 들어가는 걸 반복했던 기간도 있었다.


술버릇에 비하면 남편의 술버릇은 참으로 얌전한 것이었다. 잠을 자는 버릇은 조용하고도 지루했다. 남편이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두고 자기 시작해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특전사 출신의 친구분이 칸막이 위로 뛰어 넘어가서 깨우는 사태도 있었다.


하긴 자는 버릇은 늘 있었다. 의자가 있는 곳은 언제나 엉덩이 센서 작동으로 그의 잠을 몰고 왔다. 서서 가다가 자는 게 기면증이라면 남편의 경우는 '좌면증'이라고 불러야 할까. 술이 들어가면 잠신이 깃들어 르게 잠들었다.

'그래도 집에서는 술 안 마시잖아. 그거면 됐어.'


아쉽게도 남편은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 집에서 편의점 맥주를 사 마시기 시작했다. 4캔 만원은 저렴했지만, 맥주로 취해서 잠이 들 때까지 마시는 건 결코 저렴하지 않았다.

"차라리 소주를 마셔. 하루 6캔씩은 너무하잖아."

"소주는 이제 맛없어서 못 먹겠어."


남편이 깡맥주를 하지 않게 하려고 나는 안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육아로 지친 나도 편의점 '에일'류의 고소하고 진한 맥주맛을 알아버렸고, 취하지 않고도 술을 순수히 맛으로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밖에서 자는 것보다 집에서 자니 덜 곤란하기도 했다.


아이 출생 100일 정도가 지나고 나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분들을 집으로 초대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독박육아를 맡겨두고 나도 아는 얼굴들이 있는 술자리에 가겠다고 하면 내가 삐질 거니까. 우리 집은 가성비 술집이 되었다. 남편이 자는 동안 남편이 부른 친구분들의 여흥을 위해 아이가 깰까 봐 불안한 마음으로 늦은 술자리를 지켰다.


술이 취하면 육아를 할 수 없어서 몇 번의 숙취와 후회 끝에 나는 주량을 조절했다. 안 마시거나, 작정한 날도 2~3캔 정도였다. 남편은 주말에도 출근하면 그만이지만, 주말 육아는 오롯이 내 몫이었으니까 말이다.


아이가 6살 때 아파트에서 아이친구들의 부모로서 친해진 모임에 초대되었다. 그때 누가 즐거운 마음으로 내 맥주잔에 소주를 콸콸 부어 섞었다. 오랜만에 취한 나는 집에 갈 때 남편의 부축을 받았는데 옆에서 보던 아들이 충격이 켰나 보다.

"지하주차장에서 집에 가는데 엄마가 이렇게 막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해서 넘어질 뻔했어."

그때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이는 이후에도 종종 그때를 회상했고 나는 자중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가 술에 취해서 정신을 가누지 못하면 아이는 불안하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다. 또다시 불안한 가정환경을 나로 인해 만들 수 없었다. 이후로는 술을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고, 우는 술버릇도 자연적으로 소멸된 듯하다. 심지어 2년 전에 갑상선 수술을 한 이후에는 맥주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오늘 연애시절 때부터 알던 남편의 대학교 과동기들의 세 가정인 약 12명이 우리 집에서 1박 2일을 보낸다. 몇 년 만이다. 나도 다른 집에 초대될 때마다 집주인들이 고생하셨기에 나도 빚을 갚을 차례다. 아이들이 있으니 호프집에 계속 있을 수 없어서 굳혀진 장소다. 술을 이제 거의 안 마시는 나로서는 함께 술 분위기에 무르익는 재미는 없을 거다. 잘 그려지지 않는 모습이지만, 언젠가 술을 모두 끊고 만나는 날도 올까.


술이 원수가 되지 않을 정도만 즐기기를, 언제나 술에 대한 내 생각이다. 이 다짐의 밑바닥에는 아빠가 있다. 술에 취하면 몇 주간 끝장을 봤던 사람, 그러나 끝내 일어났던 사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자랐고, 술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잔을 부딪히면서 마음속으로 되뇐다. 술은 사람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관계를 지키는 자리로서만 존재해야 한다고. 술은 절대 고독 때는 취할 정도로 마셔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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