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_1년에 책을 1권도 안 읽는 여자
“우와~ 당첨됐어? 축하해~! 근데.. 그렇게 막 부럽지는 않다. 서울이랑 좀 멀긴 해도 애 키우면서 신도시, 깔끔하고 괜찮지~”
지혜는 서울 빌라에서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 온 지 반년 지났다.
황황하게 뚫린 대로에서 사정없이 찬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다. 몇 년 전에 직장 동료에게 들었던 한 마디가 바람과 함께 지혜의 귓가에 스친다. 기분이 나쁘진 않다. 오히려 승리의 미소가 번진다.
당첨되고도 계약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서울 아파트 청약에 비하면 당첨 확률도 높았다. 탈탈 털어 계약금도 마련할 수 있는 신도시 아파트에 7년 차 신혼부부 특별공급 턱걸이로 청약 신청 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2년 6개월 동안 입주를 기다리며 봐둔 가구와 가전에 설렜었다. 'ㄷ자 주방'도 꿈에 그리던 것이었다. 그중에 단연 최고의 기쁨은 2미터 길이의 널찍한 6인용 식탁이다. 세 명의 가족이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서 밥을 먹을 생각을 하면서 출근하는 발걸음에 탄력이 실렸었다. 더 이상 밥을 먹고 나서 방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슬기로운 식탁 생활, 꿈에 그리던 ㄷ자 주방, 소파, 천장에 달린 시스템 에어컨. 한 자리 차지했던 큰 대(大) 자 모양의 빨래건조대를 버리고 2층으로 쌓아 올린 드럼세탁기와 의류 건조기, 선 없는 청소기, 그리고 대망의 식기세척기! 지혜는 이제 만성습진과 손가락 사이에 밤마다 돋는 한포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집에 6살 아들 등원을 시켜 주고 오는 길이다. 지혜는 추위에 유독 취약하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죽음은 얼어 죽는 것이라 여길 정도로 추위가 싫은가 보다. 따귀를 때리는 칼바람에 고작 2분간 혼쭐이 났을 뿐인데 몸서리치며 미간을 풀고 지하 주차장으로 얼른 들어갔다. 왼쪽 뺨으로 넘어간 머리카락을 다시 오른쪽으로 정리한다. 지혜는 예전에 살던 집에서 아들의 어린이집 등원을 시킬 때를 떠올려본다. 비바람을 뚫고 영유아 어린이집으로 가는 길은 위태로웠다. 10분 동안 유모차를 끌고 요철이 심한 인도로, 좁은 골목길 차도로 어떻게 갔는지 아득한 옛날 같다.
아침 8시 58분이다. 주식 장 시작 2분 전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영혼 없고 억양 없고 띄어쓰기도 없는 여성형 AI 목소리가 신나는 배경음악과 함께 울려 퍼졌다.
“장시작한다오늘도성투하자 여덟시오십팔분입니다. ♬~~~~”
앗, 보는 사람도 없는데 지하 주차장에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벨소리에 지혜는 괜히 창피해져서 얼른 알람을 끈다.
오전 9시를 잊고 있다가 때를 놓친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설정한 알람이다. 장엄하게 지문 로그인을 하고 광고 팝업을 닫고, 멈춰 서서 관심 종목을 오늘의 등락 순으로 정렬해서 본다. 주차장 구석에 서서 어제 매도한 금액보다 4% 떨어진 제약주 10주를 성급하게 매수한다. 체결, 짜릿하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다시 집으로 걸으면서 동공이 빠르게 움직인다. 1분 봉 차트로 바꾸고 엄지와 검지로 확대해 보더니 아까보다 6% 더 떨어진 주식을 이번엔 20주 사들인다.
어느새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와서는 식탁 앞에 앉았다. 체결 수량의 빨간 숫자, 파란 숫자의 흐름을 하릴없이 살펴본다. 물타기를 잘했다는 기쁨으로 2% 수익을 보고 매도 버튼을 누른다.
‘아! 오늘은 카페라테를 2잔이나 벌었네!’
40분에 9천 원을 벌었으니 남편의 시급보다 고급인력이 된 느낌이다. 대세를 몰아서 다른 종목들 살 게 없나 살펴보다가 문득 카페라테를 못 마실까 봐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하아-” 지혜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한숨을 내뱉는다.
이제 식기세척기를 좀 돌려봐야겠다. 식세기의 성능을 100%는 신뢰하지 못하고 초벌 설거지를 해서 넣는다. 매번 이 테트리스가 어렵다. 그러나 설거지 시간이 조금 단축되고 손에 세제를 묻히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손가락에도 살이 그새 쪘는지 고무장갑은 장식이다. 식기세척기 덕에 손에 고무장갑 안 끼는 것만으로도 윤택해진 삶이다.
밥솥이 전기를 많이 먹는다기에 가스레인지에 압력밥솥으로 밥을 하고 찬합에 옮겨 담아 냉장고에 넣어서 데워먹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 무거운 압력밥솥을 솔로 쓱쓱 문질러 식기세척기에 넣자니 자리를 다 차지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1시간 이상 고온으로 돌아가는 기계에 더 많은 그릇과 조리도구를 넣어야 안심이다. 싱크대 압력밥솥에만 물 받아 놓고, 식기세척기에 작은 종지와 작은 컵까지 모두 끼워 넣는다.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을 때, 소소한 희열을 느끼는 모양이다.
타블렛 세제를 3분의 1토막으로 잘라 모아놓은 통에서 한 조각을 꺼낸다. 녹는 비닐이 1회용 세제 반만 헐렁하게 둘러져 있다. 고체세제의 측면에 가루가 부스러진다. 세제함에 넣고 ‘전원’ 누르고 ‘강력건조’ 누르고 ‘시작’. 완벽하다. 강력건조를 누른 것은 강력건조 기능을 해제한 것이다. 강력건조가 되어 나와도 그릇에 물기가 조금은 남아 있다. 그럴 바에 이렇게 절약 모드로 하면 1시간도 안되어 설거지가 종료되니 전기료를 아낄 수 있다.
윙윙 돌아가는 식기세척기를 뒤로하고 다시 식탁 앞에 앉아 ‘영웅문’을 켠다. 보유하고 있는 주식들이 죄다 파랗게 물들었다. 만약 상한가를 간다면 팔 수 있는 종목만 상한가에 걸어놓는다.
이번엔 세탁기에서 젖은 빨래를 힘껏 캐내서 세탁기 위에 있는 건조기 동굴로 힘차게 던진다. 마지막 빨랫감이 드럼세탁기 통 안쪽 깊숙한 옆구리에 애매하게 붙어있다. 허리를 더 숙인다. 손을 뻗다가 이대로 내 몸통이 세탁기에 들어가 버리는 것 아닌가 덜컥 겁이 난다. 건조기를 돌려놓고 다시 식탁에 앉는다.
어느새 아침 10시. 이제 주식의 움직임이 시들하다. 오늘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는데 앱을 종료하고도 손을 어쩌지 못한다. 또다시 습관적으로 주식 앱을 로그인하고 보유종목을 노려본다.
‘하... 내가 도박에 빠진 건가...?’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지혜의 남편이 몰래 대출받아 사고팔던 주식이 손 쓸 수 없을 만큼 떨어져 배우는 셈 치고 시작한 일이다. 절대 좋아서 시작한 주식이 아니었다.
이사 오기 전에는 회사 다니느라 바빴는데 잔금대출을 분양가보다 더 받고 남은 자금으로 남편과 상의해서 주식에 투자하게 된 것이다. 매월 아르바이트비 정도 버는 것이 꿈이었다. ‘애기엄마가 시장에 나타나면 끝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녀의 주변 여자들은 저마다 토스증권이나 키움증권 앱으로 삼성전자며 카카오 등 절대 안 망할 것 같다고 믿는 주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더 긴 끝물일 줄 알았는데 이번 달은 영 신통치 않았다. 신통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 토막이 나 있었다. 상승장에서는 ‘물타기’를 하면 곧잘 팔아서 대출이자를 내고도 남았는데 이제는 날이 다르게 떨어지는 수익률은 상한가를 두 번 치는 일이 있을지언정 팔 수 없는 꼴이 되고 말았다. 자금을 3배로 투입해도 소용없었다. 가망이 없어 보이는 주식을 저 아래에서 손절매했다가 다시 치고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울화가 솟구쳐 올라오던 기억들이 몇 번 떠올랐다.
‘안 팔면 손실 아니야.’
태풍의 급물살에 떠내려가는 방갈로를 멍하니 쳐다보는 주인처럼 주식계좌 역시 멍하니 바라보며 손쓸 수 없는 한 시간을 때운다. 롤러코스터 끝에 털린 영혼이다. 과연 다음 달 대출이자를 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이대로 대세 하락기가 온다면 다음 달 대출이자는 위태롭다. 대출이자를 몇 번 못 낸다면 망하겠지. 경매, 꿈에 그리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 모든 것을 잃는다!
불현듯 그녀는 번쩍 정신이 드는가 보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지? 돈 벌어야지, 돈!’
침 한번 꼴칵 삼킨 지혜는 황급히 아르바이트 앱을 깔고 일자리를 뒤적거렸다. ‘알바’라고 하면 편의점 알바와 카페 알바, 식당 알바, 물류 알바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중에 해본 일이라고는 식당일 뿐, 모두 도보 15분 이내의 음식점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인 만큼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급하게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지도에서 집과 가까운 세 군데 지원을 한다.
두 번 다시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하던 이사준비와 대출 과정이었다. 깔끔하고 넓은 30평의 집을 얻은 대신 몹시 분주했다. 집안의 자잘한 하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일정을 빼놓고 기사님 스케줄을 맞춰놓으면 또 어찌나 한 번 만에 해결을 못 하는지. 여러 번 다른 기사님이 오니 마음이 바빴다. 세탁실 쪽 발코니 문지방 찌걱거림이 네 번의 방문 후에 고쳐졌을 때는 아직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었다면 하자보수를 아예 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감마저 들었었다.
모든 것이 새로워 바쁘기만 한 반년의 시간 동안 부지런히 어린이집 엄마들을 만나며 친분도 쌓았다. 함께 놀이터에서 아이를 놀리기도 하고, 소아과는 어디가 잘하는지, 학원은 어디로 보내는지, 집에서 따로 시키는 공부가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아파트 입주자 단톡방, 맘톡방도 빛의 속도로 훑었다.
우리 집 이야기가 있냐, 없냐, 꼭 알아야 하는 건가, 아닌가 가 그 기준이었다. 혹시나 입주민으로서 도리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거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으면 낭패라는 명목하에 ‘나가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 새로 생긴 음식점이나 병원 정보를 누군가가 알려준다는 것이다.
아파트 완공 후 사전 점검 때는 24시 순대 국밥집과 한식뷔페, 편의점 한두 개 정도가 다였다. 각종 편의시설에 모두가 목말라 있었다. 단톡방에서는 근처에 점포가 하나씩 생길 때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드디어 소아과가 생겼어요」,「드디어 이비인후과가, 피부과가, 24시간 약국이, 반찬집이, 정형외과가, 커피집이, 치킨집이, 쌀국숫집이, 고깃집이, 곱창집이 생겼어요.」 그리고 「오늘 플라워카페가 생겼어요. 아메리카노 500원 오픈행사 해요! 」
‘플라워 카페라, 꽃집에서 마시는 커피는 참을 수 없지.’
지혜는 커피 수혈을 위해 후문까지 나왔다. <선플라워 카페> 간판이 보인다.
매서운 겨울 날씨에도 아메리카노 500원 행사 줄은 길었다. 거실 창으로 저 줄을 봤으면 안 나왔을 지혜는 나온 김에 카페 유리문 너머를 힐끔 봤다. 입구는 좁은데 안쪽이 'ㄱ자'로 뻗어 제법 공간이 있는 듯하다.
역시 이 동네는 뭐 하나 오픈했다 하면 할인 행사다. 알바들의 얼굴은 보나 마나 잿빛이다.
호기심에 기웃거리다 보니 지혜 뒤로 줄이 이어졌다. 지혜 자신도 모르게 중간순서가 되어있다. 안쪽도 둘러볼 겸 아메리카노를 사러 들어가 보기로 한다.
오늘같이 줄이 긴 날에 앉아서 마시면 정신이 산란해질 것 같다.
드디어 지혜의 순서다.
“뜨. 아 한 잔이요. 가져갈 거예요.”
“네,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 Take out 한잔이요~. 500원입니다.”
“아.. 혹시 카드 되나요?”
“네, 여기 카드 꽂아 주세요~”
500원짜리를 카드로 사니 미안하긴 하지만 현금 없이 나왔으니 핸드폰 케이스에 꽂아둔 카드로 결제할 수밖에 없다.
부부가 운영하나보다. 40대 중후반의 남자분과 여자분이 힘든 와중에도 친절한 웃음을 잊지 않고 있다. 오픈 기간을 쳐내고 나면 알바 둘 중 하나의 자리는 없어지려니.
비밀의 화원 같은 모습을 상상했으나 카페 내에 꽃 장식은 별로 없고 판매용 꽃들과 화분들이 보인다. 벽에 반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있어 가게 이름이 <선플라워 카페>인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오늘같이 북적이는 날에 꽃을 살 만한 사람들은 없을 성싶다. 안쪽에서 꽃을 다듬고 있는 사람은 남자 사장이다.
그리고 계산대 오른쪽에 한 서른 권이 될까, 책도 보인다. 소설, 부동산경매, 육아서, 다이어트, 동화책, ‘부자’로 시작되는 자기 계발서, 경제서도 있고 ‘나는~입니다’ 같은 종류의 에세이도 몇 권 있다. 지혜의 눈이 제목들을 훑는다.
“1년에 책을 1권도 안 읽는 사람들도 있다니 놀랍지 않아요?”
그 바쁜 와중에 여자 사장이 불쑥 얘기했다.
“아, 네? 네.. 저도 최근 1년 동안 읽은 게 없는 것 같네요.. 가끔 읽기는 했었는데 이사하고 뭐 하고 바빠서..”
변명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첫날이라 덜 꾸몄는지 이 카페의 콘셉트는 애매하다. 커피+꽃+책 조합이라니.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많은 가게가 생기고, 또 없어졌다. 프랜차이즈 카페만 생기는 것보다야 이렇게 특색 있는 카페가 좋았던 지혜는 가격경쟁에서 질 것이 뻔한 이 가게에 종종 와서 팔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네 다음분, 주문하시겠어요~?”
긴 줄을 뒤로하고 가게를 빠져나와 찬바람에 마시기 좋게 식은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1년에 책을 1권도 안 읽는 사람들도 있다니 놀랍지 않아요?’
‘꼰대 같은 저 대사는 뭐였지? 커피나 팔면 그만인걸.’
지혜는 괜히 책을 읽지 않고 있던 자신을 고백한 게 멋쩍어서 은근히 화가 났다.
요즘 폭망한 주식에 화가 난 것인지 모른다. 지혜는 실체 없는 주식을 손 안에서 사고파는 행위에 중독된 자신이 걱정되었다. 불안하고, 무섭고. 어릴 적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가 시뻘건 눈으로 소주를 찾던 그 불안정한 눈빛이 떠오르는 것이다. 분야는 다르지만 폐인이 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짜증이 났다.
‘책이라도 좀 읽어 볼까? 책이 내 불안을 좀 잠재워 줄 수 있을까?’
어느새 아이 태권도학원 갈 시간이 다가왔다.
급히 집안일 마무리를 하고 뛰어서 어린이집에 가서 벨을 눌렀다. “도훈이 엄마요~”
아이들을 인솔해 주시는 사범님이 계시긴 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는 태권도학원이다. 그러나 지혜는 직접 도훈이를 데려다준다. 짧은 신호의 횡단보도를 건널 때 아이들을 줄줄이 달고 가는 모습이 왠지 불안해 보인 것이다. 도보로 학원 픽업 하느라 또 오며 가며 30분을 잡아먹는다.
하루가 다 지나고 아이를 재우려고 눕는데 또 한 번 낮의 대화가 머릿속에 스쳤다.
‘1년에 책을 1권도 안 읽는 사람들도 있다니 놀랍지 않아요?’
놀랍긴 뭐가 놀랍다는 건가, 다 아는 사실을.
이 한겨울에 가게 문밖에까지 줄 서는 오픈 행사를 하는 그 바쁜 상황에서 카운터 아래에 비치된 책 구경을 하는 손님에게 그런 말을 거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여 사장님의 목소리는 평이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필사적인 질문 같았다.
내일 다시 플라워 카페를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지혜는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