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_프롤로그이자 결말
저녁 공기가 선선하다. 언제 벚꽃이 만개했을까. 하얀 꽃잎 몇 개가 공중에 흩날린다.
지혜의 질문에 사랑이 말했다.
“네~ 제가 소설을 좋아하잖아요. 확실히 소설 위주로 읽는 모임을 만들고 나니까 더 신이 나는 것 같아요~. 저희 아파트 회원분들도 몇 명 되고요, 한 달에 한 번씩 공통 책으로 일요일 오전에 모임 하거든요.
같은 책으로 비슷한 데서 울고, 같은 부분에서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것도 너무 재미있어요! 근데 오프라인 모임에 남자 회원분들도 한두 명 오시거든요? 그 때문에 남편이 ‘오늘 누구누구 나왔어?’ 하면서 은근히 캐물어요~.”
“그럼 남편분도 모임에 같이 가자고 해보는 건 어때요?” 지혜의 물음에,
“얘기했죠~. 제 남편은 책보단 영화가 더 좋다고 안 가겠대요.”
사랑은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뭔데요?”
“소설은 뒷이야기 스포 하면 안 되니까 같은 책을 대부분 사람이 다 읽어야 공감대를 쌓을 수 있다는 거.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 취향들이 확실하다 보니 공통 책 선정하는 것도 치열해요~ 판타지도 소설이고, 고전문학도 소설이잖아요.”
“오, 치열하기까지~! 소설도 방대하니까 그렇겠어요.”
평일에는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오늘은 주말이라 긴 머리카락을 한껏 풀어헤친 미혼의 중학교 국어 선생님 은영이 추임새를 넣는다.
왼편으로 시선을 돌린 지혜는 은영에게 물었다.
“또 다른 모임하고 계시는 은영님, 어떻게 하고 계세요?”
“네, 저 지금 박경리의 <토지> 20권 중에 이제 7권 재독 들어갔어요. <토지> 시리즈 성공하면 그다음엔 조정래의 <한강>도 시도해 볼까 합니다. ‘장편소설 도장 깨기’ 모임원들이 같이 읽고 있거든요~! 단톡방에다가 매일 몇 권에 몇 페이지까지 읽었는지만 간단하게 쓰거든요. <한강>까지 완독 하려면 1년 이상 걸릴 것 같아요. 그래도 아마 혼자서는 <토지> 재독으로 3권도 못 읽었을 거예요. 이게 처음엔 좀 어렵고 낯선데 뒤로 갈수록 점점 빠져들어요. 사투리도 실감 나고 문장이 얼마나 사실적이고 아름다운데요~! 다들 이렇게 재밌는지 몰랐데요.
근데 2개월 만에 벌써 6명 중에서 2명은 포기하고 나갔어요. 4명이 4개월째 하고 있는데 한 분은 다음 달에 출산하러 가요. 저랑 같이 <토지> 읽어 보실 분?”
은영이 명랑하게 제안한다. 그러나 방대한 20권 분량에 다들 엄두를 못 내며 딴청 피우는 모습이다.
“크-역시... 국어 선생님은 다르구나... 와.. 20권짜리를~!”
51세의 정미가 40세의 은영에게 선망과 존경의 눈길을 보낸다. 한때 교사가 꿈이었었던 정미는 안 그래도 교사라는 직업에 동경이 있는데 그것도 문학에 조예가 있는 ‘국어 선생님’이라니 모임 때마다 은영의 발언에 특히나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함께 책을 읽고 나서 같은 말도 국어 선생님이 하면 더 신뢰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저도 그럼 다음 달부터 도전해 볼게요. 제가 만만디라 진도 차이가 너무 나는 건 아닐지..”
“잘 생각하셨어요, 정미님~. 내일 갠톡드릴게요~”
낮잠을 저녁까지 잤던 생후 5개월 동생이 밤 9시도 안 되어 7살의 형보다 먼저 잠들 리가 있겠는가. 급한 대로 퇴근하고 온 남편에게 수습을 맡기고 어린 두 아들로부터 자유부인이 되어 나온 서연은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매끈하고 날렵한 코가 작은 눈과 얇은 입술에 조화로워 화장끼 없는 계란형 얼굴이 예뻐 보인다. 음식물쓰레기 한번 혼자 몸으로 자유롭게 버리러 가는 게 서연의 소원이다.
'독서 모임'이라는 명분은 그녀에게 남편의 공식적인 응원을 받으며 ‘엄마’가 아닌 ‘서연’으로서 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의 남편과 몇 년 사귀다 첫째 아들이 결혼 전에 덜컥 생기자 마음의 준비할 겨를도 없이 후닥닥 상견례하고 결혼과 출산을 해서 키워보니 영유아기에 ‘내가 너무 무지한 상태로 아이를 키웠구나’ 생각할 때쯤 서연 부부에게 찾아온 둘째이다.
이번엔 남들이 쓴다는 육아템에만 솔깃하거나 기죽지 않을 것이다. '책 봄'을 꾸준히 참석하면서 육아의 중심을 잡고 책으로 무장한 육아를 해보고 싶어서 자신의 관심 분야에 맞게 '육아서 책 모임'을 만들었다.
“서연님, 애기들 데리고 독서 모임 하는 거, 가능한 일이에요?”
“어우.. 가능은 하더라고요. 애기들 안고 책 모임 하면 좀 정신없긴 해요. 맥이 수시로 끊기는데 여기서 엥~ 울고, 저기서 ‘엄마, 놀이터 가자’ 칭얼대고.
어떤 날은 분명 선정도서로 시작했는데 엇길로 나가다 ‘기-승-전-육아’로 끝나버려요~. 그래서 이제는 아예 자기 생각을 종이에 볼펜으로 적어 복사해 오든, 타이핑한 출력물이든 나눠 주면서 최대한 1시간 내에 끝내버리죠. 아예 남은 시간이 눈에 보이는 포모도로 시계로 1시간 알람 맞춰놓고 다들 어디 쫓기는 사람처럼요 ㅋㅋㅋ”
“그럼 1시간 동안 아이들은요?”
“맘스카페에서 놀 줄 아는 아이들은 같이 놀고, 업혀 있거나, 수유실에 다녀오거나 하지요.
그래도 다들 아이들을 끼고 만나니까 오히려 눈치 볼 일이 없어요. 중간에 쪼르르 달려오는 아이를 수습하러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애기엄마들도 독서 모임 할 수 있으니까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장단점이 있죠. 체력이 받쳐 줘야 돼요. 2배로 힘드니까.”
41세의 도영은 온라인 플랫폼 브런치 작가다. 알콩달콩한 가족의 에피소드와 삶의 자세에 관해 글을 쓰고 있고, 구독자 수가 300명 정도 있었다.
은혜는 자기 계발서 '1권 1 실천' 모임을 이끌고 있으며 교회에서도 성경 읽기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었다.
딸 셋을 거의 다 키운 주희는 58세의 공기업 인사과 부장직을 하고 있다. 모임에서 나이로는 맏언니이지만 피부관리를 잘해서 그 나이로 보는 사람도 없다. 완벽주의자 주희는 일복도 많아 야근이 몸에 익었다. 그러다 보니 꾸준히 ‘책 봄’ 필사인증 목표 일수를 종종 채우지 못해서 벌칙 랜덤 선물 기프티콘으로 모임에 공양해 주고 있다.
한마을에 살면서 연령대도 사는 모습도 다른 그녀들의 독서 모임과 독서하는 방법이 자리 잡히기까지, 특히 지혜의 독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