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가 3주라서요 ①
1일
가족의 휴가
두 딸과 엄마의 여름휴가 기간이 딱 맞았다. 이 기쁜 일치를 축하하려 여름휴가의 첫 여정을 엄마 아빠가 있는 고향에서 보냈다. 노을과 바다를 좋아하는 우리는 노을을 보는 시간에 바다에서 물놀이를 할 계획이었는데 언제나 서두르는 아빠의 성화에 못 이겨서 가장 더운 시간에 바다로 향했다. 도착하니 조금 신이 나서 계획에 없던 평상도 빌렸다. 어깨를 두른 건 끈이 전부인 수영복을 입은 딸들을 보고 엄마 아빠는 살이 새카맣게 탈 것이라며 걱정했다. 긴팔을 입네마네, 모자는 챙이 있는 걸 쓰네 마네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데 꼭 10대가 된 것 같았다. 회사에서 받은 휴가가 아니라 학교에서 받은 방학을 보내는 아이들. 언니, 10대 때는 30대의 우리가 이런 모습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음 그렇고 말고.
대충 채비를 마치고 우다다 달려 바다에 뛰어들었다. 바닷물은 햇볕에 데워져서 따뜻했다. 바다 위에 누워서 둥둥 떠다니거나 바다를 가르면서 수영을 했다. 아빠는 잠깐 와서 사진을 찍어주고는 돌아갔고 안 논다던 엄마는 어느새 래쉬가드 차림으로 와서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들이 귀여워서 언니와 나는 마주 보며 생긋 웃었다. 엄마 언니와 함께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린채로 바다에서 둥둥. 어린아이가 된 순진무구한 그 표정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여름날이다.
2일
아이스크림
'아침부터 아이스크림을 먹으니까 기분이 좋다~'
아침부터 아이스크림을 먹은 엄마가 말했다. 어린이집 선생님으로 20년 가까이를 산 엄마에게 어느샌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스며들었다. 아이들을 만나면 마치 또래처럼 말을 걸고 친해진다. 민망함에 웃을 때는 혀를 쑥 내밀고 '헤헤'하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런 엄마의 말과 표정을 놓칠 수 없어서 글을 쓴다. 엄마는 더운 여름에 아침부터 식구들의 밥을 차리느라 아침부터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은 아닐까?
3일
휴가 아닌 방학
공식적인 여름휴가가 3주가 되는 시민단체엘 다니고 있다. 더운 여름에 실내에서 에어컨 빵빵 틀며 무리해서 일하지 말고 쉬어가라는 의미다. 에어컨이 없었던 사무실에서 활동가들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몇 년 전에 에어컨이 생겼지만 그 문화나 지향은 남아서 혜택처럼 누리는 시간들.
긴 여름휴가를 앞두고는 두어 달 전부터 계획을 세웠다. 어딘가엘 가거나 누구를 만나는 것 이외에는 자유시간인데 어쩐지 나는 그 시간을 잘 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이 자꾸 밀려온다. 분주한 머리에 그렇지 못한 몸을 가지고 누워있다가 언니에게 나의 머릿속 잡음을 흘렸다. 언니는 초등학교 여름방학처럼 보내라고 했다. 늦잠 자고, 맛있는 거 먹고, 숙제는 개학 때까지 미뤄두고, 밤늦게까지 놀았던 그때처럼. 순간 신이 났고 마음이 풀어져 밤늦게까지 유튜브를 봤다..... 개운하지 못한 아침은 꼭 미뤄둔 일기 쓰기 숙제를 한 번에 하는 것 같은 짜증을 불렀다.
4일
빨간 수영복
입추, 아침부터 물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친구들 몇몇에게 갑자기 번개를 쳐보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 마침 집 근처 야외수영장이 야간개장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동거인을 꼬셨다. 동거인의 퇴근시간에 맞춰 해가 넘어갈 때에야 수영장에 도착했다. 나는 올해 새로 산 빨간 수영복을 입었다. 작년에 갑자기 빨간 수영복에 꽂혔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사지 못하고 덮어두었다. 동료가 새로운 비키니를 샀다는 소식을 듣고는 빨간 로망이 다시 피어났다. 올해 내가 빨간 수영복을 사지 않으면 내년에 또 피어나겠구나. 평소 나 같지 않게 10만 원을 훌쩍 넘는 수영복을 단박에 사버렸다. 돈으로 풀어줄 수 있는 것도 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조금 더 당당하게 빨간 수영복을 입는 것이 남은 여름휴가 물놀이의 목표다. 야외 수영장에서 먹은 컵라면 국물의 짠맛은 정말 최고였다. 집에 와서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5일
지하철도 흐름
오늘은 수련장엘 가는 날. 미역국을 먹으면서 지하철 시간표를 확인했다. 지하철 시간을 확인하는 건 나로서는 아주 드문 경우다. 바쁜 사람들이 즐비한 도로 상황을 고려하면 수련장까지 나를 태워줄 도반의 차를 타기 위해서는 서두르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조금 빠른 걸음을 하면 6분 뒤에 오는 지하철을 탈 수 있겠다 싶어 방금 먹은 미역국이 옆구리 한 편을 아프게 할 만큼 빠르게 걸었다. 그런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출구의 에스컬레이터가 또 공사에 들어갔다.
아아, 신이 나의 삶을 다 계획하고 있다면 나는 12분 뒤 지하철을 타도록 설계를 해놓은 게 분명하다. 나는 집을 나오기 전 내내 '흐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4주간 발효음식과 창업을 연결 짓는 학교를 지난 다니면서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그래서 당신은 이 일을 어떻게 하게 되었나요? 그 많은 선택지를 뒤로하고요'였다. 그들의 이 뱉는 단어 하나하나를 주워들으며 내가 조립한 결론은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흐름을 탔다는 거였다. 어떤 인연에 의해서. 기회에 의해서. 그걸 깨닫게 되니 진로에 대한 나의 복잡한 마음이 단순 명료해졌다. 나의 발걸음도 제 속도를 찾았다. 이제 지하철 어플을 여는 빈도는 더 낮아질 것이다.
6일
수련
한 달에 한 번 정기수련이 있는 날, 지난 두어 달간 요가 수련을 제대로 하지 않았더니 몸이 거부를 하는 듯 모든 게 어렵게 느껴진다. 명상을 하는 내내 하품이 나와서 꾸벅꾸벅 졸았고 몸을 움직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쌀쌀해진 날씨에 졸음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는 선생님의 말을 위안 삼으면서 2박 3일간 열심히 잤다. 꾸준히 계속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 느낀다.
7일
단맛과 담백한 맛
- 저는 더 있으려고요. 여름휴가가 3주라서요.
2박 3일의 수련이 끝나고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삽시간에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를 혼자만의 존재감으로 꽉 채우는 애인이 잠시 왔다. 얕은 계곡 자락에 자리를 잡고 지난 일주일간 쌓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나는 차분히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좋다. 밥을 다소곳이 먹는 모습이 좋다. ‘나는 단 걸 좋아하니까요’ 하면서 나에게는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단 음료를 마시며 짓는 웃음도 좋다. 나이 차이가 꽤 나서 주변의 걱정을 사기도 하지만 솔직히 당사자는 그것을 느낄 새가 없다.
이전의 애인도 단 것을 유독 좋아했다. 사람을 맛으로 표현한다면 그 친구는 그가 좋아하는 단맛이었다. 그는 매력적이어서 나는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아주아주 달아서 미간이 절로 찌푸러지는 단맛의 사람이라는 건 그에게 내가 살면서 내 본 적 없는 화를 내면서 알게 되었다.
내 앞에서 고구마라떼를 마시고 있는 그 역시 카페에서는 주로 초코라떼를 편의점에서는 초콜릿우유를 마시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담백한 맛에 가깝다. 내가 단맛의 사람이 되어도 쓴 맛의 사람이 되어도 그는 한결같이 담백한 맛이다. 슴슴해서 한 입에 그 매력을 알 수는 없지만 돌아서면 어쩐지 생각나는 사람. 그를 오래 곁에 둘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일까? 짜졌다 달아졌다 써졌다 하는 맛은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